17103

노트 2017. 10. 21. 21:40

31  시월의 마지막 아침. 이른 시간인지라 밖은 컴컴하다. 일어나 휠체어로 옮겨 타 소변을 뽑은 후 멍하니 정신을 차리며 앉아 있는데, 문득 노래 한 소절이 스쳐 지나간다. ‘멀리서 기적이 우네요 누군가 떠나가고 있어요’. 아침 댓바람부터 뭔 청승인가 싶어 킥 킥 웃음이 난다.


28  이른 오후에 여주 초입의 남한강변 버드나무 아래로 갔다. 버드나무는 어른 셋이 팔을 벌려 손을 맞잡아야 두를 만큼 밑동이 굵었고, 높디높았으며 그늘의 너비도 지름 십 미터는 족히 될 듯했다. 먼저 와 자리를 잡은 치읓부부가 간이탁자를 펴고 보를 덮고 있었다. 탁자에 다가가 자리를 잡고 둘러보니 사방이 땅까지 내려온 버드나무 가지에 잎으로 가득했다. 가지가 늘어지는 나무가 좋다. 그래서 벚 중에서도 올벚에 마음이 간다. 빛을 향해 하늘로 오르려 애쓰지 않고 게으르고 심심해 보여 좋다. 이응이 준비해 온 주꾸미볶음으로 점심을 먹고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어른들은 설중매 한 잔 씩 쥐고 가만히 앉아 재즈를 들으며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뉘엿뉘엿 지는 해처럼 앉아 있었다. 되도록 말도 삼갔다. 볕과 그늘과 바람과 하늘이 그야말로 ‘가을 가을’했다. 정말 오랜만의 한가한 소풍이었다.





26  컴퓨터가 부팅이 되지 않아 수리를 맡긴지 어언 나흘이 지났다. 수리기사는 수리점 문을 굳게 닫은 채 연락 두절 상태. 기약 없이 기다리자니 무료해 드로잉북을 찾아 이틀 째 자화상을 스케치하고 있다. 여러 장 심혈을 기울여보지만 거울 속의 얼굴도 나 같지 않은데 거울 속의 나를 그린 그림은 더군다나, 너 누구니, 나와 전혀 닮질 않는다. 손재주가 없는 건지 눈썰미가 없는 건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려지는 나는 그리는 나와 전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허공만 바라본다. 아직도 나는 나를 보는 게 두려운 게냐.


25  애런 코플랜드Aaron Copland, 1900-1990. 미국의 고전음악 작곡가. 나디아 블랑제에게 사사. 초기에는 재즈와 추상적 어법이 강했으나 후반에는 민요풍의 독특한 형식을 확립. 드넓은 미국의 자연과 개척정신을 표현하는 작품을 다수 작곡하여 ‘미국 작곡가들의 교장선생님’이란 별명을 얻음. 대표작 <Appalachian Spring>으로 퓰리처상 수상. 그가 미국 작곡가란 걸 알고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주제가 있는 곡들을 들으며 ‘미국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20세기 중반, 미국이라는 나라의 활기와 삶의 긍정, 미래에 대한 희망 같은 것? 그러나 여기서 ‘미국적’이라는 것은 ‘미국 주류 백인 남성’적 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지을 수 없었다.

<클라리넷 협주곡> <Quiet City> <Appalachian Spring> <El Salon Mexico>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Our Town> <피아노 소나타 G장조> <The Tender Land> <Rodeo>


24  아이가 물었다. “아빠, 아빠는 누구하고 제일 친해? 나 말고 엄마 말고 할머니 말고 할아버지 말고. 가족 전부 다 말고.” 생각해보았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찰라에 명멸하며 지나가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감히 친하다 말하기에는 조금씩 어긋났다. 하여 솔직하게 말했다. “없는데?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아이가 말했다. “정말? 한 사람도 없다고? 그럴 수가 있나? 나는 윤주원하고 박정운하고 제일 친한데.” 정말 아무도 떠오르지 않을 수 있는 건가? 그래도 괜찮은 건가?


22  외상값 200원도 갚고 새 껌도 살 겸 마트에 가보자고 아이를 꼬드겨 집을 나섰다. 빌라 현관문을 여니 바람이 소리를 내며 심하게 불고 있었다. 바람을 헤치며 지름길로 막 접어들었는데 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이 길 위에 가득했다. 휠체어 바퀴로 은행을 밟으면, 오 마이 갓, 그야말로 낭패인지라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여 우회하기로 했다. 흙먼지가 도로를 굴러다니다 집보다 높이 떠올라 날아갔고, 낙엽들도 질세라 무리를 지어 차도를 누비고 다녔다. 앙증맞은 돌개바람에 낙엽들이 원을 그리며 돌다 흩어지기도 했고, 커다랗고 높다란 느티나무 아래에는 부러진 잔가지들이 질펀했다. 아이는 바람에 휘청거리는 자전거를 세우고 서서 눈을 부비다 잠시 바람이 잦아든 틈을 타 다시 전진하기를 되풀이했다. 휠체어도 밀릴 지경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일본에 상륙한 태풍 때문에 바람이 지랄맞은 거라고 하자 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태풍아, 너 너무 한 거 아녀?” 이 상태로는 도저히 목적지인 마트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 아이만 보내고, 자동차 옆에 붙어서 바람을 피하며 아이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 한가로운 마을, 한가로운 시간에 나는 왜 여기 휠체어에 앉아 이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일까. 이 순간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생각을 접고 그저 바람을 즐기기로 했다. 분명 성가시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맞아보는 거센 바람이, 바람을 맞으며 거리에 있는 내가 보기 좋았다.




21  산책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112  (0) 2017.12.06
17111  (0) 2017.11.03
17102  (2) 2017.10.12
17101  (0) 2017.10.02
17093  (2) 2017.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