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2

노트 2018. 2. 24. 09:40

11  구와 기가 찾아왔다. 대흥리 식당에서 닭볶음탕을 안주로 낮술을 마셨다. 지나간 일들을 꺼내 씹으며 히히덕거리다 구가 말했다. “형. 전시합시다. 내가 운형한테 지원받아 전시 했었잖아요. 작년 말에. 지원 조건이 뭐였냐면 그림 팔아서 다음 사람을 지목해 개인전을 지원해주는 것. 릴레이 형식? 뭐 그런 거지. 그림 좀 팔았어. 그래서 다음 전시할 사람으로 형을 지목하러 온 거예요. 전시합시다. 형. 이제 그림 그려야지. 조건은 같아요. 형이 전시하고 나서 다음 사람을 지원해주는 거.” 잠시 생각하다 순순히 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옆에서 소주를 홀짝이던 기가 말했다. “의왼데? 남의 도움 받기 싫어하고 자존심 쎈 녀석이라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내가 바람 좀 잡으려고 했더만.” 사실 나도 구의 제의를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내가 낯설고 좀 요상스럽기는 했다.


13  오후에 구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전시장 대관 계약서와 공간 입면도였다. 그러곤 덧붙였다. [형님! 전시장 대관 계약했습니다.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3전시실입니다. ㅎㅎ 이제부턴 그림에 몰두하셔야 합니다.^^] 허, 빠르기도 하시지. 계약서를 확대해 보니 내년 2월 13일이 오픈일이었다. 정확히 1년 후였다. 문득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그려졌다. 울고 있었다. 그린 그림을 보며 울다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서러움이나 슬픔은 아니었다. 기쁨이나 벅참 같은 것도 아니었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게 눈물로 지금까지의 지난한 내 생을 한 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이 그림, 나쁘지 않다. 내가 내 그림을 보며 울 수 있다는 건 적어도 거짓을 그리는 건 아닐 테니.


16  차례를 지냈다.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숙이며 할머니께 절을 드렸다. 처음으로 죄송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할머니를 위로해드렸다. 당신의 고단했던 삶을 다독였다. 죄송해하고 간절하게 바랄 때보다 마음이 훨씬 가볍고 충만했다. 그제야 할머니도 웃으셨다.


17  원과 아이가 상계동으로 간 뒤 저녁을 먹고 기립기 한 판 서고,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굴러다니다 원이 꺼내주고 간 와인과 과자를 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혼자 와인을 홀짝이며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정주행했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그야말로 밤을 꼴딱 샜다. 드라마의 무대인 교도소라는 특별한 공간에 잠시 몸담았던 적이 있었던 터라 재미있었다. 교도소를 떠난지 30년이 지났음에도 그 풍경이 그 관습들이 익숙하다. 음지의 전통은 양지보다 변함없이 유구하게 지속된다.


20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Op.85>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E단조 Op.82> <피아노 5중주 A단조 Op.84> <관현악을 위한 에니그마 변주곡 O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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