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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0. 11. 1. 11:57

친구 미음이 개인전을 연다 해서 모처럼 시내 나들이를 했다. 늘 '새로운 것'에 갈증을 느끼며 우왕좌왕 말이 많던 내용과 형식이 맥을 잡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이전 몇 회 그의 개인전에서 보았던 익숙한 얼굴들은 사라지고 객들의 면면이 낯설었다. 늦게 온 디귿에게 연유를 물으니 그가 말했다. 견디지 못하고 다 떠난거지. 그림 붙잡고 사는 삶이 어디 쉬운가.
삼십 대 초반. 미음, 디귿과 종종 술을 마셨었다. 훗날 셋이 전시 한 번 하자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후로 미음과 디귿은 궁핍해도 그림과 살았고 나는 일과 방황 사이를 오가다 이제야 시작하는 터라 삼인전은 언감생심이다. 분발할 밖에.(10)

목탄을 사용해 검정색 배경에 흰 매화꽃을 그린 그림을 소개하는 글. '작가가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다시금 나무를 그리는 까닭은 목탄으로 나무를 그림으로써 생명은 순환한다는 진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 설명한다. 덧붙인 작가의 말 '목탄은 나무를 태워서 숲의 영혼을 표현하는 사리이다.' 목탄으로 다시금 나무를 그리는 행위와 순환의 의미는 일면 적절하고 매력적이지만 덧붙인 작가의 말은 왠지 멋있고 달아서 당기지 않는다.(09)

버스와 지하철은 오래 전부터 내게는 일종의 서재였다. 오고 가며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글을 끼적이고 밑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근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 버릇이었다. 홀로 자유롭고 홀로 생산하는 유일한 시간. 허나 올 초 부터 그 서재에서 잠드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잠자리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때로 하루가 허해져서 몸 둘 바를 보르곤 한다. 차근히 마음 먹고 천천히 회복해야지. 그 시간들.(08)

하늘은 맑고 바람도 차가우니 무심히 작업실로 들어갈 수 있으랴. 마을을 걷는다. 바람에 흔들리다 못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날고 아카시나무 가지 끝에 조용히 앉아 있다 훌쩍 자리를 뜨는 까치의 날개 끝이 햇빛을 등지고 환하게 빛난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 꽃이 피고 지고 이파리가 돋는 걸 살펴보았던 산수유나무에는 빨간 열매가 가득 달려 있다. 옛날에는 처녀들이 저 열매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씨를 빼냈다지. 그렇게 해 말린 열매가 더 비싸게 강장제로 팔렸다지. 네가 저 열매를 입에 물고 오물거리는 상상을 한다. 색다르지만 제법 어울린다 생각하며 웃는다.
제법 큰 소리로 굴러다니며 나를 쫓던 버즘나무 낙엽들이 앞서 간다. 녀석들을 보며 지나가는 시간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이치려나? 마음이 다급해져 빨라지는 발걸음을 애써 늦추며 가을, 하늘과 나뭇잎과 흙의 색들을, 바람과 냉기를 만끽하려 숨을 길고 느리게 들이쉰다. 이미 십일월이지만 강산에 노래에 빗대 중얼거린다. 그래도 가을이다,라고.

'361 타고 집에 간다'를 듣고 있다. 그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이, 달빛요정이 역전만루홈런을 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동생은 최근 들은 부고 중에 가장 충격적이라 말하며 마음 아파 했다. 어찌어찌 알게 되어 즐겨 들었었고 몇 곡 되지 않는 노래방 레파토리 중 하나였는데,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멀리 가고 말았다. 명복을 빈다. 역전만루홈런 따위 필요 없는 곳에서 절룩거림 없이 편안히 노래하시길.(06)

내 이름이 이러하단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나무가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서서 뿌리 내리려 있는 힘을 다해 애쓰는 형국이라고. 그러면서도 자꾸 어디론가 가려한다고.
심란하다만 돌이켜보고 내다보면 이해할만 하다. 다만 그런 내 옆에 있는 이가 안쓰럽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단다. 죽을 힘을 다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는 것. 이건 좀 서글프다. 허나 그렇다면 그렇게 움직일 밖에.(03)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길을 사진에 담으려는 아버지의 바람을 따라 섬으로 가는 길에 다섯 살 조카가 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남이섬에 간다 했더니 조카 왈, "남에 섬은 왜 가요?" 생각했다. 그래! 나의 섬.(03)

원소리. 오랜만에 보는 맑고 밝은 별들 아래서 서성거렸다. 검고 높다란 낙엽송 숲이 별과 잘 어울려 지구가 아닌 다른 별의 한쪽 구석에 있는 듯 했다. 선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비아 사막에서의 첫 밤. 별을 보러 밖으로 나섰다 별이 하도 많아 그만 현기증이 나 휘청거리다 모래에 쓰러졌다고. 비현실적이었고 일면 공포스럽기도 했다고. 그런 기분이었다. 신비롭고 아름답다기 보다는 두려움 같은 것. 별들이 내게 음침한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그 신호를 전혀 해석할 수 없는 막막함 같은 것. 비현실적이면서도 명징한 현실의 어둠 같은것.
뒤척이다 잠들었다. 몇 번 씩이나 깨어나 앉아 창 밖의 별들을 보았다. 조금의 위안도 있었지만 훨씬 더 큰 불가사의로 몸이 떨리곤 했다.(02)

분홍집이 사라졌다. 낡고 번잡해져서 보수하고 정리하려 했는데 깔끔히 날아가버렸다. 웹전문가인 히읗씨가 안타까워하며 복구하려 애써주었으나 이미 신기루가 되어버린 터라 그도 어쩔 수 없었다. 하여 새 집을 마련했다. 집은 바뀌었지만 나는 그닥 새로워지지 않았으므로 문패는 바꾸지 않는다. 대략 오 년을 거주할 생각이다. 나인 듯 아닌 듯 정겹게 어울려 살다 훌쩍 떠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그런 집.(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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