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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1. 3. 17:46
10.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창에 빗방울이 맺힌다. 다닥 다닥 밀도가 높아지더니 어느새 빽빽하다. 11월의 비니 차가울 것이다. 어둑해지는 창의 빗방울들을 보며 상상한다. 작고 포근한 전집. 호박전 동그랑땡 김치전 녹두전 고추전 깻잎전 버섯전 감자전 등이 차려진 따뜻한 모듬전에 이왕이면 지평밀막걸리. 마늘 청양고추 양파가 간장에 절여진 양념장. 갓 무친 겉절이 김치에 자작한 계란찜. 마주 앉은 사람 하나 또는 둘. 누구나 입에 올리는, 세간을 떠도는 이야기가 아닌 내가 몰랐던 음악 몰랐던 시 몰랐던 우주 몰랐던 눈물 몰랐던 과학 몰랐던 섬 몰랐던 슬픔 몰랐던 마음. 그리고 몰랐던 그 또는 그들의 이야기. 창밖으로 쏟아지는 비와 비소리. 같이 술잔을 기울이는 그 또는 그들의 얼굴이 딱히 그려지지는 않지만 그 이야기의 풍경 속에서 위로 받는 나........퇴원해 집으로 돌아가면 비 오는 날에는 꼭 전을 부쳐 막걸리 두어 잔 곁들여야지. 원과 온과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나누면서.

09. 보조국사 지눌이 불문에 들어온 이들에게 올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하기 위해 저술했다는 「계초심학인문」을 일타스님의 풀이로 읽는다. 선방에 들어 참선공부를 할 때 삼가야 할 것들에 관한 대목을 읽다보니 '문자를 탐하여 구하는 것을 삼가라'라는 구절이 있다. 얼마 전 무연스님과의 통화가 떠오른다. 이야기 끝에 스님이 읽고 싶은 책이 있느냐고 물었고, 내가 삶과 존재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불교 사상이나 과학, 철학 등의 책을 읽고 싶다고 하자 스님이 말했다. 지금 그런 책들을 읽으면 거기에 혹해 지금의 '나'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문자의 관념 뒤로 도망칠 수 있다고. 지금은 '지금의 나'를 솔직하고 깊이 들여다보고 만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긍정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억압하지 말고, 희망이라는 수사로 대충 웃으며 넘기지 말고 세세하게 감정을 따라 울고 웃으라고.

08. 점심을 먹고 껌 하나 씹으려 서랍을 연다. 유황가루 자일리톨껌 기능적전기자극패드 크로키북 전기면도기 친환경파우더 돋보기안경 커터칼 박트로반연고 과도 의료기상영수증 손톱깍기세트 병원진료비영수증 욕창방지방석공기주입기 가위 노무사홍보수첩 모나미볼펜 팔노미노블랙윙육공이 일제치약 악력기 이어폰 빈편지봉투 단주 환의교체쿠폰 면봉 휠체어바퀴공기주입기 점안액 기혈자석 포켓몬카드한장 코털가위 휴대용등긁개 장애인증명서사본 옛휴대폰 휴대용물티슈 법무사명함 사탕세알.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두서없이 뒤섞여 헝크러진 채 가득 차 있다. 내 마음 같다.

07. 동생이 전화해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웃으며 말했다. "토요일에 광화문 나가셔야지?" "이 몸으로? 휠체어 끌고?" 뭔 소리냐는 듯 대답하곤, 휠체어를 몰고 그곳에 가면 장애인 그룹에 몸담아야 하는 거냐 아니면 텐트에서 숙박하고 있는 블랙리스트 예술가들을 찾아가야 하는 거냐, 잠깐 생각했다. "뭐 어때요. 커뮤니티 하나 만들어서 휠체어 부대 조직해 봐요. 멋지겠구만." "크크, 그럴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불구의 몸 운운하며 가지 않을 것이다. 가기로 하자면 어딘들 못 가겠는가. 몸은 핑계일 뿐, 마음이 없는 것이다.

05. 원 : 아들, 너는 니 장점이 뭐라고 생각해?
온 : 내 장점? 잘 웃는 거. 행복한 거. 운 좋은 거. 나 뽑기 같은 거 잘 하잖아.
원 : 그렇구나. 엄마는 그런 거 운이 없는 편인데.
온 : 아니야. 엄마도 운 좋은 사람이야. 왜냐면 나 같은 아들을 낳았잖아. 친절한 남편도 있고.
원 : 듣고보니 그러네. 그럼 아빠는?
온 : 아빠도 운이 좋지. 엄마랑 결혼했으니까. 근데 그러니까 우린 운이 좋은 가족이네?

02. 이십 년 전 오늘, 허름한 그늘의 작업실로 원이 왔다. 동그란 단발머리에 무테 안경을 쓰고 하얀 얼굴에 옅은 청웃옷과 청바지를 입고 감청색 배낭을 매고 왔다. 그렇게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어두운 부엌 식탁에서 낮술을 마셨다. 술이 모자라 구멍가게를 찾아 현천리 고개를 함께 넘을 때 보았던, 오후의 햇빛을 받아 깊고 선명하게 드러나던 그의 회갈색 눈동자에 매료되었다,고 쓰는데....... 뭐니! 이 눈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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