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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1. 13. 12:06
19. 중앙선을 타고 양평으로 가고 있다. 휠체어 배려 공간에 앉아 단풍의 시절도 지난 풍경을 정성스럽게 바라보며 말러의 교향곡 4번을 들으며 눈부신 햇살에 얼굴을 찡그리며. 원과 온이 기다리는, 어제 이사한 집으로 외박을 하러 가고 있다. 멀리 억새가 햇빛을 받아 마치 스스로 빛인 것처럼 반짝인다.

17. 누나가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고백을 보내주었다. 위암을 이겨낸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지휘하는 말러 교향곡 3번을 듣다 생각났다고 했다. 아바도가 자신의 후임 지휘자인 사이먼 래틀에게 한 말이라 덧붙였다. "내 병은 끔찍했어. 그러나 결과가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 내 안 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말이야. 마치 위를 잃은 대신 내면의 귀를 갖게 된 것 같았다네. 그 느낌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설명할 순 없지만 난 아직 그때 음악이 내 삶을 구했다고 여긴다네." 몇 번 천천히 읽었다. 그 '느낌'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삶이 음악이었던 그와 달리 딱히 내 삶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나는 무엇이, 아니 무엇으로 내 삶을 구해낼 수 있을까?

15. 검고 깊은 강가에 앉아 있어. 물에서 태어난 안개가 이승에 속하지 않은 생물처럼 천천히 돌아다니고 있어. 적막과 어둠이 무서워 돌을 던져. 돌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폭 폭 소리만 희미하게 울려. 이 밤의 한숨 같아. 나는 왜 여기에 놓여있는 걸까. 너도 없는 곳에. 세상의 저 편 같은 곳에. 하늘도 땅도 그저 칠흑인 곳에. 사지를 웅크려 몸을 동그랗게 마는데 강 건너 멀리 소리가 들려. 들릴듯 말듯 오래 날아와 고단한 소리. 깃털이 상하고 닳은 소리. 세상의 소리일까. 네 목소리일까. 달그락거리며 일어나 조심스레 물을 디뎌. 빠지지 않아. 한 발 더 디뎌. 그렇게 물 위를 걸어. 물이 내 무게를 짊어지느라 애쓰는 게 느껴져. 기적이 아냐. 물의 힘이야. 너의 힘이야. 네 어깨가 느껴져. 끝내 의심하지 않고 건널 수 있을까. 이 저 편의 강을. 빠져 흐르지 않고 다다라 너와 우리를 이룰 수 있을까. 걸어가고 있어. 안개가 자꾸 정신을 붙잡는 물 위를.

13. 어제 누나가 조그만 화분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들국화였다. 겹으로 풍성한 노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유일한 가구인 수납장 위에 올려 놓았다. 두 다리 휘날리며 탁구를 치다 깨어난 아침. 화분에 물 몇 모금 주고 꽃에 코를 박고 깊이 향기를 맡는다. 들의 냄새가 난다. 내 이름이기도 한 들. 들도 다리도 그립다.

12. 서울 광화문 일대와 전국 곳곳에서 백만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퇴진과 구속을 외치고 있고, 홍천 원소리에서는 식구들이 엄마의 진두지휘 아래 김장을 담그고 있고, 양평 옥천에서는 원이 다음 주에 이사할 집을 홀로 가열차게 청소하고 있는 2016년 11월 12일.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녹색병원 6층을 떠돌고 있다. 아! 이럴려고 이 땅에, 아들로 태어나, 결혼을 했는가라는 자괴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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