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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2. 23. 13:06
30. 시국이 하 수상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연말이지 않느냐며 치읓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근처 오복족발집에 자리를 잡고 불족과 소주를 주문했다. 촛불과 인간의 도리, 노안과 쇠퇴, 그림과 재능, 진화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불쑥 가슴에 손을 얹더니 아내가 그립다 했다. 하루 하루 미안하고 안쓰러워 마음 아파하고 있다 했다. 매일 매일 머리에 심장에 손끝에 무릎에 핏줄에 발끝에 아내가 찾아온다고 했다. 대개 말기의 그 바싹 마른 몸으로 와서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했다. 위로가 필요한 몸이라 했다. 술잔을 부딪히며 미안해 하라고 눈물 지으라고 마음 끓이라고 애간장 태우라고, 다만 스스로를 학대하지는 말아달라고 위로해주었다. 그는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노라며 쑥스러워했고, 나는 그 비밀스러운 이야기 내 귀로 듣게 돼 기쁘다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좀체로 가난하고 그늘진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던 이 인간이 요즘 마음을 열고 하소연도 하더니만 그 자존심에 위로까지 운운하다니. 그래 그때부터 그랬던 거야. 비슷한 시기에 그는 아내를 잃고 나는 다리를 잃은 후부터. 서로의 불행이 술자리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고 있고만. 그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울고 싶으면 내 어깨에 기대. 그가 하-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지랄!

29. 비관적인 자와 거품생맥주를 마셨다. 그의 목소리는 '세상을 어둡게만 보아 슬퍼하거나 절망적으로 여기는 상태'인 비관과는 어울리지 않게 맑고 투명해 듣기 좋았다. 자세히 보고 정확하게 들으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도 비관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그는 스스로를 비관적이라 평했다. 그런 그 앞에서 마치 오백만년만에 대화라는 걸 처음 하는 사람처럼 더듬거리고 버벅거리며 낙관을 이야기하는, 더구나 깊이 성찰해 본 적도 없으면서 비관도 낙관으로 귀속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나를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웠고 볍고 가볍게 느껴져 민망했다.
그의 비관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비관은 살면서 입게 된 상처를 통해 세상을 깊이 들여다보는 자가 갖게 되는 숙명 같은 건 아닐까.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삶의 비밀에 가까이하려 애쓰는 자의 운명 같은 건 아닐까. 세상과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림 없는 퍼즐을 맞추려는 자의 수고로움 같은 것은 아닐까. 비관은 비주류와 아웃사이더와 소멸과 통하고 나아가 연대하지 않을까. 하여 비관적인 자들은 자신 안에서 숙명과 맞서거나 화해하며 고난의 매듭을 풀고 묶고, 소수와 관계하므로 적어도 세상에 해를 입히지는 않지 않을까. 세상을 황폐하게 하는 건 오히려 낙관적이고 열정적이며 확신에 찬 주류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신념들과 생산물들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비관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맥주가 맛있어졌다. 맥주집을 소개시켜준 치료사의 경고대로 안주는 형편없었지만, 수다를 떠는 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관적인 자는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 말하고 귀 기울여 들었다.

27. 이 노래 불러드릴 게요. 그 많던 곤궁과 환란을 몸소 겪으시면서도 늘 소녀 같았고 지금도 그러하신, 오늘도 싹이고 꽃이신 엄마에게. 건강하신 여든에 감사드리며 -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때 뿅뿅뿅 놀고 간 뒤에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미나리 파란 싹이 돋아났어요 엄마 엄마 요기 좀 바라보셔요 노랑나비 호랑나비 춤추는 곳에 민들레 예쁜 꽃이 피어났어요 민들레 예쁜 꽃이 피어났어요.

26. 죽음은 '죽을 운명'이라는 공포와 그러한 허약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자 통로이다.

22. 비가 나를 불렀다. 일어나 등뼈를 맞춘 후 침대에서 내려 와 창문으로 빠져 나갔다. 기다렸던 비는 나를 번화가로 데리고 가 귀퉁이의 까페 섬. 앞에 내려놓았다. 끼이익 문을 열고 섬.에 들어섰다. 섬.은 어둡고 검은 숲이었다. 음악도 검고 찻잔도 검고 이끼도 검었다. 조명도 검고 고라니도 검고 엽차도 검고 계산기도 검고 물소리도 검었다. 별도 꽃도 검었다. 주인이 느리고 어둡게 맞이해주었다. 흰 환의를 입은 채로 와 혼자 유별나서 몸을 줄이며 정숙하도록 애썼다. 따뜻한 우유를 주문했다. 물론 우유도 검었다. 마시니 갓 뽑은 피의 온기가, 아직 다하지 않은 생명의 기미가 심장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스르륵 마음이 놓였다. 애초에 피가 검은 짐승이었던 것처럼, 어두운 그늘에서 태어난 몸인 것처럼 편안해졌다. 숲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하나의 어둠이 아니었다. 뭉뚱그려 검지 않았다. 그 누구도 결코 환하지는 않았지만 각기 흡수해 품고 있는 빛의 양에 따라 제 밝기를 지니고 있었고, 그 밝기는 고정되지 않고 관계와 필요에 따라 변화하며 전체를 이루었다. 수만의 층위를 가진 검음이라니. 이리도 다양한 명도의 어둠이라니. 우유를 비우고 심장이 검게 따끈해지자 섬. 밖에서 똑 똑 비가 나를 불렀다. 모든 검은 것들에게 동족의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비를 따라 빛나고 번화한 불빛들을 헤치며 병실로 돌아왔다. 침대에  등뼈를 가지런히 눕히고 눈을 감았다. 검은 비가 방울 방울, 방울마다 다른 어둠으로 그늘로 쏟아져 벌거벗은 내 몸에 꽂히고 있었다. 온 몸에 점 점 점, 수만 점으로 새겨지고 있었다. 따끔 따끔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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