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3

노트 2017. 1. 23. 19:23
30. 별 일 없이 별 뜻도 없이, 속상한 밤. 혼술이 당긴다. 한숨 지으며 나와 주고 받던 밤들의 그 술과 그 취기가 그립다.

28. 지지난해 가을에 다쳐 지난해 설과 기일과 한가위에 뵙지 못하고, 오늘에서야 아버지와 동생과 아이와 함께 밥을 올리고 술을 따라 인사드린다. 휠체어에 앉아 머리 숙여 절을 올리니 할머니께서 말씀하신다. '괜찮다. 다 괜찮다. 아가야. 다리 그거 아무 것도 아니다. 네가 지금 거기 있는 게 내겐 기쁨이다. 그러니 미안해 마라. 내 멀리서나마 응원할 테니 잘 자라거라. 아가야.'

26. 날이 추워진 후로 아침에 눈을 뜨세 지역의 실시간 날씨를 체크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2017년 01월 26일 오전 05시 42분, 세 곳의 현재 온도 이렇다. 서울 면목동 - 7.8°C. 양평군 옥천면 - 11°C. 홍천군 북방면 - 14.9°C.

24. 그가 간다. 발목이 겨우 보이던 긴 치마에 단화를 즐겨 신던 마흔 다섯 소녀가 뒷모습으로 간다. 쥐어짜던 고통의 육신을 벗고 두렵던 죽음을 건너 이름 없는 혼으로 간다. 죽음 그 뒤의 일들을 내 알지 못하니, 그곳이 어디인지 내 알 수 없으니 그저 바랄 뿐이다. 빛으로 가서 빛을 끄고 고요하시길.

22. 분명 북가좌동 그 골목 그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건만 눈을 뜨니 집도 동거인도 낯설다. 집은 반듯하고 동거인은 누군지 알지 못하겠다. 동거인 옆으로 앞으로 오고 가도, 나는 영혼인가, 그는 나를 모른채 먹고 씻고 벗고 입고 떠난다. 아! 이 집, 무너졌지. 그 골목, 땅 속에 묻혔지. 그 위에 새 집이 높게 선 거지. 그렇다면 그와 나는 다른 시간에 같이 있었던 것인가. 고심하다 집을 나선다. 눈이 오신다. 복합주거단지를 벗어나 낮고 익숙한 마을을 통과해 개천길로 내려간다. 세상은 이미 한 치 눈에 덮여 있다. 보둑 보둑 발자국이 새겨지는 걸 보니 단지 혼이 아니라 무게있는 몸과 함께로구나. 마음이 놓인다. 개천은 얼었다 녹았다 하며 강으로 흐른다. 이 길도 강으로 흘렀지. 물따라 길따라 걷는다. 좌우로 눈 쌓인 풀과 나무들에서 얼핏 얼핏 색이 보인다. 푸른 붉은 노란, 자주 보라 분홍이, 그리고 흰. 이 계절에 이 추위에 이 눈에 설마 꽃들이려나. 다가가 자세히 보니 맞다. 놀랍게도 꽃들이다. 매화에서 달개비를 지나 산국까지 봄 여름 가을의 꽃들이 색을 뱉고 있다. 한 겨울에 그래서 모든 계절이 함께 있다니. 계절 사이를, 눈과 얼음과 꽃 사이를 잘근 잘근 걸어 강에 다다른다. 강은 눈에 덮여 거대한 백지다. 흠집 없이 고요하다. 넋놓고 바라보다 강의 순결과 적요가 두려워, 건너려 온 것은 아니지, 뒤돌아 가려는데 북가좌동에서 온 길이 닫혀 보이지 않는다. 사라진 저 길, 눈 속의 그 꽃들은 지나온 시절에 대한 배웅이었던가. 어찌할 줄 몰라 강과 끊어진 길 사이에서 평온해지지 않는 숨을 고르는 동안 눈은 더 굵어져 무릎까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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