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1

노트 2018. 4. 12. 13:50

10  히읗씨가 문자를 보냈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음악회에 갈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솔깃했으나 혼자 갈 수는 없는 일. 원과 아이가 귀가한 뒤 논의해 본 결과, 평일인지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시간에 맞춰 가려면 빡빡하고 공연 후 돌아오는 시간도 만만치 않아 접기로 했다. 챙겨주셔서 고맙다고, 여차저차 못 가겠다고, 봄을 즐기고 있느냐고, 이웃들과 수다 떨며 잘 지내시냐고 답문을 보냈더니, 히읗씨가 수다가 만발하는 봄날에 얄님 수다도 좀 들어보고 싶다는 답신을 보냈다. 기립기에 서서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그 소리가 톡 토독 가볍고 정겹게 들렸다. 아! 이런 날에는, 이런 비 내리는 봄날 저녁에는 조금 따뜻하고 밝은 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그야말로 정답게, 들려줄 곳 없던 수다를 만발했으면 좋겠고나. 잠시 달콤한 상상에 빠졌다.


09



07  구리롯데백화점에 있는 엔제리너스 커피숍에 혼자 앉아 있다. 사람들로 가득하다. 크고 작은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져 알아들을 수 없게 시끄럽다. 그래도 좋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낯선 사람들의 읽히지 않는 물리적 소리인가. 원이 주고 간 제임스 앨런의 [운명을 지배하는 힘]을 펼쳐 읽는데 눈에도 머리에도 들어오지 않아 바로 접고, 망고슬러시를 쪽쪽 빨며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이것 또한 좋다.


05  저녁을 먹는데 아이가 밥을 다 먹고는 말똥말똥 원을 바라보았다. 원은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제가 먹던 밥을 더 덜어주었다. 와구 와구 맛있게 먹는 아이에게 말했다.

“온이 너 살찐 게, 갑자기 아빠가 다쳐서 상실감 때문에 허한 마음을 먹는 것으로 달래다 그렇게 된 거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닌 것 같다? 엄마가 밥을 맛있게 해주고 자꾸 덤도 주니까 그렇고만.”

“아니야. 아빠. 둘 다야. 그리고 아빠 다친 거 때문에 그런 게 좀 더 컸어.”

“야, 그럼 너 밥 먹을 때 물 이렇게 많이 마시는 것도 아빠 탓이냐?”

아이가 말했다.

“아빠 다치기 전에는 내 마음이 풍부한 바다 같았었는데, 아빠 다치고 나서는 마음이 메마른 사막이 되어버렸지. 그래서 물을 많이 마시기 시작한 게 버릇이 된 거야.”

깨갱.


04  새벽에 잠이 깨 빗소리를 듣는다. 토닥 토닥 토닥. 시원하고 발랄한 것이 위로를 해주는 것 같다.


03  bok이 딸기 한 상자를 들고 집으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그의 수다를 한참 듣고 나서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지금 내 상황에 맞는 형식과 그에 따른 재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전에 원이 만났던 역술인이 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림 그리는 게 맞는 사람이기는 한데, 그림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하고 있네요.’ 나의 낭만은 허술하다.


02  아침에 일어나면 소변을 뽑고 난 뒤 20분가량 발을 주무르며 음악을 듣고, 20분간 호흡명상을 하고 능엄신주를 지송한다. 주문을 외우며 원을 세우기도 하는데 요즘의 원은 이렇다. ‘더 나빠지지 않기를.’ 나아지기를 바라던 전의 바람보다 더욱 간절하고 절실하다.


01  아이가 아침부터 ‘되고송’을 연거푸 들으며 베시시 웃는다. 여자 아이가 깜찍한 목소리로 태연스럽게 부르는 노래다.

[늦잠 자면은 지각하면 되고. 날씨 좋으면 재끼면 되고. 그러다가 회사에서 짤리면 방콕하면 되고(역시 뭐니 뭐니 해도 방콕이 제일이야). 생각 없이 살면 되고. 야근시킬 땐 도망가면 되고. 근무시간엔 게임하면 되고. 그러다가 회사에서 짤리면 다른 회사 가면 되고 (112번 들어오세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생각 없이 살면 되고.]

그래, 그러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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