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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8. 4. 21. 14:08

20  장애인의 날이다. 아무래도 관심이 간다. 중증장애인들이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위해 광화문길 아스팔트를 온몸으로 굴러가고 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이끌고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다. 전진은 더디고 또 더디다. 대통령을 만나려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시설수용정책을 폐기하고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 장애인노동권 및 교육권 보장, 장애인활동지원 확대 등을 촉구하고 대답을 듣기 위해서다. 장애인들이 더 이상 시혜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배제되지 않고 차별 받지 않는 동등한 권리의 주체라고 외친다. 편안히 누워 페북을 통해 그들의 분투를 본다. 장애인들의 삶이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들의 싸움 때문이다. 싸우지 않으면 떡 하나 줄 생각 없는 곳이 이 사회란 걸 그들은 삶으로 깨닫고 그래서 행동한다. 아주 작더라도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19  잠들기 전 오늘의 마지막 소변을 뽑으며 창밖을 보니 초승달이 떠 있다. 월첨이 선명하다. 이제 서서히 차올라 둥근 보름달이 되겠구나. 둥근? 보름달? 달은 반사하는 태양 빛에 따라 그믐으로 초승으로 상현으로 하현으로 보이지만, 달은 늘 보름달처럼 둥글다. 그믐이든 초승이든 상현이든 하현이든 모두 보름달이다. 항상 둥글다. 아이도 그러하지 않은가. 아이도 늘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을 내 그림자를 투영해 저 녀석이 그믐이네 초승이네 하현이네 상현이네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그 그림자는 단지 내 욕심일 뿐이지 않은가?


18  hong선배와 jun선배가 각각 두 시간 씩 달려 옥천면으로 왔다. 냉면에 완자를 곁들여 낮술을 마셨다. 시답지 않은 수다를 떨었지만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라고 하지 않았던가. 먼 길, 고맙다.


어제 근로복지공단 장해심사를 받았다. 누나와 매형의 도움을 받아 아주 편안하게 수원지사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홍천 검산리에서 양평 옥천리로, 나를 태우고 수원 정자동으로 갔다가 다시 옥천리로, 나를 내려주고 홍천 원소리에 들렀다 다시 검산리로 돌아가셨으니, 노구를 이끌고 장장 여섯 시간 반을 운전한 매형이 수고 많으셨다. 당케 당케 당케 쉔. 그리고 오늘 연락이 왔다. 장해1급 8호에 수시간병으로 판정이 났다고 했다. 다치고 나서 생전 받아보지 못했던 급수인 ‘1급’을 두 번이나 받게 되었다. 장해판정까지 받고나니 이제 진정 한 시절이 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퇴원하고 1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온 첫 날 밤에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비록 불구이나 삶은 온전히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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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장해심사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기 위해 원과 병원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전마을로 차머리를 돌렸다. 다 지기 전에 벚꽃을 보여주려는 원의 배려였다. 바람이 불어 꽃이 눈처럼 날렸다. 아름다웠지만, 어쩔 수 없이 4년 전에 진 아이들이 생각났고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났다.


14 인간 눈에는 세 가지 종류의 색 수용체가 있어서 원색 세 개와 주요 혼색 네 개를 감지하는 데 반해 미국박새는 자외선을 감지하는 색 수용체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그 덕에 미국박새는 원색 네 개와 주요 혼색 열한 개를 볼 수 있어서 인간이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넓은 색시각 범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조류는 색범위가 좁기 때문에 색시각의 정확도가 세밀해 색의 미묘한 차이를 인간보다 훨씬 잘 분간한다고 한다. 미국박새 뿐이겠는가.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그 수만큼 제각기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인다. 세상의 실재는 그 수만큼 있는 것이다. 한 치도 같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실재라고 믿는 이 세상, 원래부터 이렇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이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규정한 세계이고, 인간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인간만의 실재일 뿐이다.


13  우리말로 풀이한 반야심경을 외우다 그냥 한문으로 지송하라는 스님의 권유가 이해되었다. 우리말 해석본을 외우다보니 말에, 내가 알고 있는 말과 단어의 뜻에 묶인다. 그 ‘말’은 내 생각의 범주 안에서 작동하는 개념. 결국 내 생각의 틀에 갇힌다는 것.


12  꿈을 꾸었다. 기차 밑에 몰래 매달려 가기 위해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장치와 공간을 용의주도하게 마련한 뒤 자리를 잡았다. 기차가 출발했다. 레일과 바퀴 사이로 여러 풍경들이 스쳐지나갔다. 휘황찬란한 도시를 지나가기도 했고 푸르른 산과 강이 등장하기도 했다. 어느 역에 정차했다. 틈으로 북적이는 사람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기차가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나는 몸을 의지하던 장치에서 떨어져 철로에 누웠고 기차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일어나 역으로 갔다. 역 대합실에는 오래된 영화관이 함께 있었다. 얼른 매표소로 가 가장 빠른 강원도행 열차표를 달라고 했다. 판매직원이 말했다. 강원도 열차는 2시 16분에 양평 가는 게 제일 빠르네요. 양평은 강원도가 아니지 않느냐며 가고자 했던 지역명을 기억해내려 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이 바쁘다며 타박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생각이 나 ‘세곡’이라 말하며 표를 달라고 하자 직원이 세곡이란 곳에 가는 기차는 없다며 한심한 듯 쳐다보았다.


11  어제 저녁에 줄자를 들고 작은방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공간과 가구의 크기를 재던 원이 새벽부터 낑낑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김치냉장고를 옮기고 수납장과 책장들의 위치를 이동시켜 정리한 후 거실에 있던 디지털피아노를 작은방으로 들였다. 거실을 넓혀 작업 공간을 확보해주겠다는 게 목적이었다. 수건 두 장과 민망한 근력을 도구로 모두 혼자 해냈다. 워낙 관록이 붙은 일인지라 어렵지는 않았으나 갈수록 힘에 부친다고 하소연했다. 피아노 있던 자리를 비롯해 거실을 깔끔하게 쓸고 닦은 뒤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아이고, 다음에 이사하면 선방처럼 해놓고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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