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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8. 5. 11. 10:58

09  오후 쉴 시간이 되어 매트에 올라와 음악을 들으려 이어폰을 찾는데 주변에 없다. 이불을 뒤지고 기립기 위를 살펴봐도 없다. 끙! 포기하고 누워 바지를 추키는데 뭔가 잡힌다. 살살 잡아당겨 보니 이어폰이다. 바지 속에서 나오고 있다. 오전에 쉬고 매트에서 휠체어로 옮겨 앉을 때 무언가 검은 선 같은 게 눈에 스쳐지나가더니, 이어폰이었구나. 감각이 없으니 이어폰을 깔고 반나절을 보낸 거였구나. 엉덩이를 만져보는데 다행히 눌린 자국은 없다. 기저귀 속으로 들어간 건 아니었으니. 어쨌거나 대략난감. 통증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아픔을 모른다는 건 감각의 불행이다.


08  원과 아이는 잡초를 뽑겠다고 대야와 호미 하나씩 들고 법당 쪽으로 올라갔고, 나는 절 마당에 다소곳이 앉아 녹음 짙은 앞산을 바라보고 있다.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는다. 전후좌우에서 들려오는 여러 새의 노래 소리. 물 흐르는 소리. 호미가 자갈을 긁는 소리. 풀꽃을 심는 한 보살의 콧노래 소리. 목탁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의 수다 소리. 잎이 바람을 맞는 소리. 내 숨 소리. 소리들이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순간을 만든다. 평온하다.





06  원이 수소문 끝에 찾아낸, 문턱이 높은 기존의 화장실에 경사로를 설치한 게 전부지만, 그래도 혼자 드나들 수 있으니 감지덕지라고 세 번째 숙박을 하고 있는 서울 노원역 근처 저렴한 호텔의 장애인 객실에서 아침을 맞는다. 출렁거리는 침대에서 어렵사니 일어나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소변을 뽑은 뒤 벽에 기대 앉아 있다.

어제 전철을 타고 올라와 처가식구들과 만났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다섯 명의 오월 생일을 한꺼번에 축하했다. 정해놓은 주량을 훌쩍 넘겨 소주 다섯 잔에 맥주 오백을 마셨고, 오백만 년 만에 노래방에도 갔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노래방을 찾느라 식구들이 고생 좀 했지만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기로 한 마음에 내공이 생겨 기특하게도 그닥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즐거웠다. 아이들이 아이돌그룹의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추며 무대를 주도했고, 어른들은 조심스레 꼽사리를 껴 윤밴과 김광석, 강산에 등의 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의 외출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할 짓 다한 것 같아 흡족했다.

아침이 왔는데도 두터운 살구색 커튼이 굳게 닫혀있어 어두운 방. 옆 침대에서 아내가 색색거리며 자고 있다. 그동안의 행태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외힐머니댁에 올라간 아이는 집에는 없는 티브이를 보기 위해 벌써 일어나 있을 것이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아침 여섯 시부터 오후까지 비가 온다고 했는데, 비가 오고 있으려나? 예보대로 비가 온다면 전철역까지 휠체어로 굴러가야하니 비 좀 맞겠다. 뭐, 세 식구 좀 젖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04  유효기간이 지난 otp단말기를 새로 발급받기 위해 원과 함께 집을 나섰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바람이 가까이 각양각색의 풀꽃과 나무들을, 멀리 숲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는데 그 형세가 거칠지는 않았다. 옥천면 농협에 주차한 차 안에 앉아 있으니 원이 창구 직원을 데리고 와 서류를 작성하고 새 단말기를 발급받았다. 다음 목적지인 의료기상사로 갔다. 기저귀와 자가도뇨 물품을 구입해 트렁크에 실은 원이 가맥하기 딱 좋은 곳이 있다며 차를 몰았다. 도착한 곳은 백안리 입구의 새 편의점이었다. 차가 드문 이면도로쪽으로 3단 데크를 깔고 단정한 테이블과 의자를 배치해놓은 곳을 가리키며 원이 말했다. 어때? 가맥하기 그만이지? 내려서 한 고뿌 하실텨? 사양하고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바람이 거셌다. 길 건너 반찬가게 뒤 커다란 느티나무의 가지와 잎들이 쉼 없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원이 콘을 사가지고 와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은 바람도 많고 시간도 빠듯하니 다음에 작정하고 옵시다. 난 가맥이 좋더라고. 답답하지 않고 가볍잖아. 가로수로 심은, 무성한 하얀 꽃이 하염없이 바람에 흔들리는 이팝나무 아래를 달려 아이가 열심히 드럼을 치고 있을 스튜디오로 향했다.


03  물감과 캔버스를 비롯해 각종 기름과 기름통, 팔레트와 붓과 나이프까지 유화 작업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일괄 구입했다. 십여 년 만에 만져보는 재료와 도구들이다. 쫌 설렌다. ㅎ


01  소변을 뽑고 발을 조물락거리며 올리비에 메시앙의 Catalogue d'Oiseaux(새의 카탈로그) 1번을 듣는다. 난해한 메시앙의 곡들 중 그나마 들을 만해서 몇 번 들었던 곡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음들의 배열을 들으며 생각한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그림이든 그 음악을 듣고 그 문학을 읽고 그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들을 통해 나를 듣고 나를 읽고 나를 보는 것이다. 지금 나는 메시앙이 아니라 나를 듣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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