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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0. 11. 23. 09:47

오디오가 고장 나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담겨 있는 안단테 칸타빌레를 자장가 삼고 있다. 온이를 업고 재우며 음악을 듣던 태홍이 말한다. “과거를 회상하게 하네. 이 음악. 지난 10년이 오락가락 하네요.”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과거와 현재....... 마음이 아프다.(30)

나 홀로 제 멋에 겨워 사는 게 아니라면 돈이라는 것이 커다란 문제로구나.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발맞추어 살아가려면.(29)

우는 소리를 했더니 옛다, 자네가 건네준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담겨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예전에 아버지가 술 취해 오시면 자주 들으셨고 때로 눈물도 흘리셨던, 자네가 애써 찾았다고 덧붙이며 수많은 연주 중 가장 선과 색이 풍부하다고 말했던, 존 윌리엄스가 지휘하는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의 그 버전. 잘 듣고 있네.
기억하시는지? 겨울이었고 해가 질 무렵이었다네. 아버지와 자네와 내가 운곡제雲谷齊 창가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이 곡을 듣고 있었지. 각자 아무 말 없이 제 삶을 돌이켜보고 내다보며 고요히 창밖을 바라보았었네.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었지. 생각했었다네. 삼부자 모여 앉아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젖는 게 흔한 일은 아니겠지? 무슨 생각을 하시고, 할까? 이 인연, 내 삶이 중요한 이유로구나.
오늘은 나만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노래 부르듯’ 어두운 거실을 맴맴 돌며 듣고 있자니 코끝이 찡해지네. 이 선율,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게 하는 힘이 있군 그래. 주마등처럼 지나가네. 슬픔도 회한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그저, 눈물. 그게 힘이 되기도 하는 법. 고맙네.(28)

태홍이 말했다. “나, 사십 되는 거 상상해봤어요? 사십 되기 전에 죽을 줄 알았는데.......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걸 알아주시길.”  그야말로 내일 모레 사십이 되는 그녀에게 많은 걸 미루며 사는 나는 뜨끔했다. 그녀에게 늘 스물 아홉 같다고 말하곤 했는데 어쩌면 나이가 버거워하는 짐을 넘겨 받지 않으려는 이기심은 아니었을지. 짐, 덜어주려면 세심하고 바지런해져야지.(26)

태홍이 친구에게 선물 받은 아이팟을 압수해 듣고 다녔었다. 그 녀석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세탁기를 돌려 망가뜨린 지 어언 일 년. 때로 아쉬웠고 섭섭했지만 지낼 만 했다. 어제, 버스를 타고 가며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옛 팝을 손가락 장단을 맞춰가며 따라 부르다 엠피쓰리 플레이어가 간절해졌다. 
제대로, 가만히, 몸 깊숙히 듣고 싶다. 지읒씨가 보내준 가요와 아코디언 연주와 히읗씨가 새삼 일깨워 준 재즈. 거문고와 가야금 산조도. 무엇보다 문득 섭렵해보고 싶어진 피아노 협주곡들이.(24)

점심을 먹고 마을을 산책한다. 하늘은 파랗고 볕은 따스하다.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얇게 퍼져있다. 단풍나무 잎들이 쪼그라들고 색이 바란 채 매달려 있을 뿐 대부분의 나무는 잎을 다 떨구고 가지만 뾰족하다. 까치가 먹이를 찾아 낮게 날고 갈참나무 잎들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지나다닌다. 걷다보니 소림사 옆 집 담 너머로 뻗은 장미 가지에 조그맣고 붉은 꽃 한 송이 홀로 지지 않고 있다.
악의 꽃. 그 시집 표지의 그림이 빨갰었던가?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옆구리에 끼고 조용히 흐르듯 걸어 다니던 이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이 학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그는 작은 눈에 두툼한 돋보기안경을 쓰고 교복이 헐렁할 만큼 마른 몸에 얼굴은 창백했었다. 쉬는 시간에는 가만히 책을 읽었고 점심시간에는 홀로 밥을 먹거나 밖을 서성거렸다. 반 아이들 누구도 그와 말을 섞지 않았고 그도 누구와도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몰래 눈 여겨 보았는데 그런 생활이 몸에 밴 듯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몸을 꼿꼿이 하고 천천히 홀로 다니는 모양이 어쩌면 그가 반 아이들 모두를 거부하는 건 아닐까, 생각할 만큼 여유로워 보였다.
그 여유로움과 꼿꼿함을 빼면 요즘의 나는 그때의 그와 다를 바 없다. 부르는 이도 없고 굳이 만날 사람도 없으며 전화를 걸지도 전화가 오지도 않는다. 딱히 볼 일도 없고 부러 일을 만들지도 않는다. 작업실과 집만 오고간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상이 불만인 것은 아니다. 오직 그리고 쓰는 일에 집중하려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고, 삶을 더 간편하고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소설가 박민규처럼 몇 가지 원칙을 세워 실행에 옮겨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첫눈도 내렸으니 내 속에 들어앉기에는, 아니 내 속에서 바삐 움직이기에는 그만인 계절이 되었다. 건투를 빌어주시길.(25)

장자를 읽고 있다. 소를 잡는 포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무곡에 맞춰 춤추는 것처럼, 악장에 맞춰 율동하는 것처럼 소를 잡는다. 신이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하늘이 낸 결을 따라 칼을 놀린다. 그가 말한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포정이 문혜군에게 하는 말.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읽는데 몸이 짜릿하다.
인의예지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의 도덕과 관습, 개인의 습관과 딱딱한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래서 두께가 없는 칼. 살과 뼈를 중히 여기는 주류의 세상이 돌보지 않는, 그래서 자유로운 틈. 그 둘의 합.(23)

태홍이 거실에서 매리는외박중을 보는 동안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다. 문근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오른다. 문근영과 비교해보면 생김새도 몸매도 목소리도 나이도 전혀 다른 사람. 생각한다. 아, 그니도 그때, 애교를 부렸던 거였구나.(22)

버스가 한강을 건널 때 마음속에서 뭔가 덜커덕거려 꺼낸다. 하염없이 접시꽃을 바라보던, 똥개 갱지가 누워있기도 했던 지난날의 노란 의자. 의자를 업고 강을 건너 바다로 간다. 모래사장에 세워두고 어깨동무를 한다. 의자, 이렇게 멀리 와서 이렇게 멀리 본 적 없었지?
버스가 급정거를 한다. 운전사가 뛰어내려 승용차와 실랑이를 한다. 의자를 마음에 넣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투명인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는 순간이동을 하는 초능력자이든지.(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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