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1

노트 2019. 6. 10. 08:19

09  아버지 사십구재. 아침 일찍 엄마와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부탁했다. 할아버지 잘 보내드리고 오라고. 아이는 넵! 씩씩하게 대답하고 서울로 출발했다. 제를 지내는 절에 이르려면 많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해서 포기하고 집에 남았다. 가족이 모여 제를 시작하는 10시에 맞춰 전동기립기에 의지해 섰다. 올 첫 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써왔던 반야심경 원문을 두 번 필사했고 능엄신주를 한 번 외운 뒤, 기립기에서 내려와 컴퓨터를 켰다. ‘엄마아부지’ 사진 폴더에 들어가 한 컷 한 컷 들여다보았다. 주름과 검버섯이 가득한 얼굴로 드물게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한마디 했다. 웃으면 이렇게 환한 것을. 아부지, 잘 가소. 생에 또 오거들랑 그때는 부디 외롭게 살지 마소. 가시고 나니 당신 참 외롭게 살았구나, 마음 아프니 바라건대 다음 생에는 복작거리며 소소하게, 외롭지 않게 사소. 이렇게 환하게 자주 웃음서. 아부지.

 

06  아내는 아침 일찍 서울로 가고, 휴일 핸드폰 사용 시간을 오전에 다 써버린 아이는 뒹굴 뒹굴 [무한의 마법사]를 읽고 있던 오후. 물길을 그리던 붓을 놓고 아이에게 산책을 제안했다. 환호하며 문을 열고 나가 경사로를 깔아준 아이 덕에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하늘이 잔뜩 흐렸다. 킥보드를 타고 앞서 가는 아이를 따라 굴러갔다. 아이는 사진을 찍고 풀꽃을 들여다보는 나를 기다렸다 가까워지면 다시 출발해 멀어지고 다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아이는 오늘의 행선지인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페친인 권모님이 애정해 마지않는 ‘흑임자비비빅’이 혹시나 있을까 싶어 아이스크림 냉동고를 뒤져보았다. 역시나 없었다. 췠! 그 귀한 분이 이런 면 단위까지 오셨을 리가 없지. 마음을 비우고 기다릴밖에. 아이는 왓따풍선껌 두 통, 부라보콘과 빵또아, 파워오투, 불닭볶음면을 집어 들었다. 내가 막걸리를 더해 계산하고 편의점을 나섰다. 두툼한 봉지를 킥보드 손잡이에 걸 길래 휠체어에 늘 걸고 다니는 아빠 가방에 넣으라고 했더니 아이는 랩을 하듯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아빠 가방에 넣은들 어떠하리. 내가 걸고 간들 어떠하리. 사과맛이면 어떠하리. 오렌지맛이면 어떠하리.”

큰길에서 집 쪽으로 들어가는 골목의 집을 찍는데 아이가 말했다.

“역시, 우리 아빠야. 오늘도 낡은 집하고 창문을 찍는구만. 그것도 꼭 정면으로. 아빠, 옆모습도 찍고 비스듬히도 한 번 찍어 봐.”

아이 말대로 나는 왜 늘 정면에 집착하는가? 아이의 말대로 비스듬히 한 컷 찍고는 떨어지기 시작하는 비를 피해 집을 향해 힘껏 바퀴를 굴렸다.

 

03  엊그제 구리백화점에서 구입한 토퍼가 배달되었다. 아내가 잠자기 전에 토퍼를 두툼하게 깔고 덮을 차렵이불도 새로 꺼내 잠자리를 개비하자 리코더를 불고 있던 뛰어들어 뒹굴며 좋아했다.

온 _ 아이고, 푹신하다. 천국이 따로 없네. 천국이 따로 없어. 좋아. 좋아, 개좋아!

그러고는 리코더로 ‘오블라디 오블라다’를 기쁨의 나팔처럼 재빠르게 불다 말고 엄마에게 물었다.

온 _ 근데 엄마 이거 얼마야? 비싸?

원 _ 이거? 비싼 거야. 잠 좀 잘 자볼라고 엄마가 무리 좀 했지.

비싸다는 말에 아이가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온 _ 이 더러운 자본주의 세상!

더러운 자본주의? 킥 킥 웃다 넌지시 물어보았다.

나 _ 아들, 자본주의가 뭔지 알아?

온 _ 알지. 그걸 왜 몰라? 애들도 다 알아. 그 정도는.

나 _ 자본주의가 뭔데?

온 _ 자본주의? 음....... 자본이 뭐겠어? 돈이잖아. 그러니까 자본주의는 돈이 주인인 거지.

나 _ 근데 왜 더러워?

온 _ 뭘 하든 돈이 있어야만 되니까. 근데 난 돈이 없잖아. 우리 집은 가난하고. 그러니까 더럽지.

나 _ 그렇군. 그럼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면 좋을까?

온 _ 잘.

나 _ 잘?

온 _ 어. 잘.

그 사이 책을 읽기 시작해 건성으로 대답하는 아이에게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거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반백년을 살면서도 이 ‘더러운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른 채 떠밀리듯 흘러가고 있는 형편이니, 뭐 잘났다고 아이에게 묻겠는가 싶어서.

 

02  동성애라 불리는 성적 지향은 찬성하거나 반대할 어떤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에베레스트가 존재하는 것처럼, 바다가 존재하는 것처럼, 이 지구가 공전과 자전을 하며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려 ‘명징’하게.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063  (0) 2019.06.21
19062  (0) 2019.06.17
19053  (0) 2019.05.21
19052  (0) 2019.05.12
19051  (0) 2019.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