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1

노트 2019. 10. 2. 08:07

06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가맥 어때? 구름도 좋은데. 오, 옙! 쌍수를 들어 환영한 뒤 가맥의 의의를 들먹이며 아이에게 동의를 구했다. 아이는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러지 뭐.
아내는 자전거를 타고,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나는 휠체어를 타고 옥천면 번화가로 출발했다. 막 지기 시작하는 노을을 향해 달려가는 아내와 아이의 뒷모습이 움직이는 시의 한 구절 같았다, 그 풍경에 문득 울컥해서 바퀴를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가 뒤돌아보며 소리쳤다. 아빠, 또 사진 찍어? 얼른 와!
7분가량 달려 큰길가 편의점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평범한 노을이 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나타난 초승달이 예뻤다. 바람도 시원했는데 아내와 나는 동시에 바다 바람을 떠올렸다. 속으로 다짐했다. 조만간 아내의 로망인 ‘바닷가 조개구이’를 성사시키겠노라고. 맥주를 마시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불닭볶음면을 해치운 아이는 킥보드를 타고 개천을 건너 레포츠공원 놀이터에 다녀오기도 했고, 편의점 주차장을 맴 맴 돌기도 했다. 세상에. 이 얼마만의 가맥이란 말인가! 헤아려보니 4년 만이었다.
남은 맥주 한 캔을 가방에 넣고 파라솔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미세한 오르막인데 힘에 부쳤다. 아내와 아이도 자기의 바퀴가 있어서 내게 보조를 맞춰주며 천천히 앞서 갈 뿐 나를 밀어줄 수는 없었다. 그게 좋았다.

 

03  아내가 선물 받은 포켓북 「평생 꼭 암송해야 할 성경 말씀 100선」을 읽다 말고 식탁에 두었는데, 아이가 뭐냐며 집어 들어 훑어보았다. 아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이왕 펼쳤으니 찬찬히 읽어보고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구절 하나를 골라보라고. 아이는 포켓북을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벌렁 누워 읽었고, 가장 좋은 글과 가장 싫은 글, 그러니까 베스트와 워스트 한 구절씩을 선정해 발표했다.

베스트 _ 56.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6:19

선정의 변 _ 겸손 좋잖아. 난 내가 자랑하는 것도 남이 자랑하는 것도 싫더라. 누가 나를 칭찬하는 것도 별로고.

워스트 _ 25.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편 95:6

선정의 변 _ 우리를 여호와가 만들었다고? 아니잖아! 그런데 왜 무릎을 꿇으라는 거야?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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