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

노트 2019. 10. 2. 11:22

11  면사무소에서 상속 관련 서류를 발급 받고 차에 타며 말했다.

“비도 그치고 구름도 두툼하고 바람도 적당하고 날씨 좋네. 정말 가을이 오려나 봐.”

휠체어를 뒷좌석에 싣고 운전석에 앉은 아내가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날 좋다시니 남편 코에 바람 좀 넣어줘야겠고만. 네비 찍어 보셔. 양수리 000-0.”

양수리로 달려 강가 까페에 도착했다. 주차장 자갈이 잘아서 휠체어가 움직이기 좋았고 경사로가 길고 완만해 오르기 쉬웠다. 야외 데크에 놓인 테이블에 앉았다. 잔디밭 건너 바로 강이었다.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이려나? 강물은 잔잔하게 움직였다. 실내로 들어간 원이 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살금살금 마시며 풍경을 살펴보았다. 왼쪽으로 양수대교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고, 그 위로 시선을 올리니 산꼭대기에 천문대 같은 하얀 구조물이 서 있었다. 검색해보니 예봉산이었고 강우관측소였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렸다. 중앙선 철교가 강을 건너가고 있고 운길산역 절반이 보였다. 역 위로 운길산이 있고 그 7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수종사가 보였다. 사고 나기 전 해 가을에 원과 꼬불 꼬불 모닝을 몰고 저 산을 올라 수종사에 들렀었지. 거기서 내려다보던 풍경 중 한 곳이 여기였구나. 그러고는 움직이며 하류로 흘러가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원이 물었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느냐고.

“풍경을 보고 있자니,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자니 무상이 밀려와서. 다 사라질 거잖아. 세상 모든 존재는 저 강처럼 변함없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생겨나고 지나가고 사라지는 거잖아. 사라질 것들에 관한 애도랄까? 그냥 별 생각 없이 멍하게 앉아있었는데도 슬프네.”

원이 말했다.

“그 슬픔이 당신의 기저랄까? 당신 감정의 근원을 이루는 것 같기도 해. 뭐, 나쁘지 않아.”

그 말이 한없는 위로처럼 들렸고 사라진다는 것이 위안처럼 느껴졌다.

 

19  아이와 수다를 떨던 원이 아이에게 물었다.

원 : 아빠 장점은 뭐라 생각해?

온 : 아빠? 음....... 쎈스가 좀 있지.

원 : 쎈스? 아빠 유머는 썰렁하다고 했었잖아? 춥다고.

온 :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쎈스가 좀 있는 것 같애. 그림도 쎈스 있고.

원 : 그럼 엄마 장점은?

온 : 엄마? 어....... 민들레 같은 거?

원 : 민들레? 민들레 같은 게 어떤 건데?

온 : 어떤 거냐면....... 어....... 청결하고 꼿꼿한 거?

원 : 꼿꼿한 건 그렇다고 치고, 청결은 뭔 뜻일까? 청소 잘 하고 깔끔한 거?

온 : 아니, 그런 거 말고....... 음....... 구리지 않다고 해야 되나? 마음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실제도 그렇고 더러운 게 없는 거. 지저분하지 않은 거.

그림을 그리던 내가 끼어들었다.

일 : 올~ 우리 아들 사람 볼 줄 아네. 아빠가 보는 엄마의 최대 장점이 ‘사심이 없다’는 건데, 그래서 구리지 않고 꼿꼿할 수 있는 거지. 너도 나중에 그런 민들레 같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근데 사귀는 친구는 있어? 연애 같은 거 말이야.

온 : 없어. 지금 그런 거 뭐 별 의미가 없을 거 같아서. 내가 더 자라고 성장한 다음에 할라고.

원 : 그게 언제쯤일 것 같은데?

온 : 음....... 열일곱 살? 열일곱 살이면 몇 학년이지?

원 : 고등학교 1학년.

온 : 그때쯤이면 뭐 괜찮을 것 같네. 그 정도면 정신 차리고 살고 있을 테니까.

일 : 연애가 나이 정해놓고 하는 거냐? 마음이 동하면 하는 거지.

온 : 뭐 어쨌든 지금은 관심 없어.

그러더니 느닷없이 엄마에게 물었다.

온 : 엄마, 엄마는 아빠가 좋아? 빌리 엘리어트가 좋아?

원 : 뜬금없이 웬 빌리 엘리어트?

온 : 엄마가 빌리 엘리어트 좋아하잖아. 자, 아빠를 남편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개개인의 박야일, 그러니까 이미 정이든 남편 말고 객관적으로 이제 막 만나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아빠가 좋아? 빌리 엘리어트가 좋아?

원 : 음....... 사실 엄마는 그림 잘 그리는 사람보다 춤 잘 추는 사람이 더 좋아. 크 크.

아이는 오늘 남은 게임 시간 30분을 불태우기 위해 엄마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원 : 아빠, 좀 잘 해라. 춤도 좀 추고. 앗! 근데 다리가....... 뭐 어때. 휠체어 댄스 개발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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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s 0 : Comments 2
  1. 이화 2019.10.10 20:36 Modify/Delete Reply

    가을 입니다.
    생각없이 좋기도 하고 문득문득 생각에 빠져 가라앉기도 합니다.
    가을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종사는 서울에서 잠간 머물 때 '고래' 씨랑 갔었지요.
    내려다보이는 두물머리의 물빛이 생각납니다.
    사라진다는 것이 주는 것은 꼭 그림자만이 아니고 빛이기도 하다는
    그런 모호한 생각을 했던 적이있었는데 마음이 잔잔해졌습니다.
    얄님의 "위안"이 저에게도 스며듭니다.

  2. yaalll 2019.10.14 22:15 신고 Modify/Delete Reply

    분홍집에서 뵈니 무척 반갑습니다. 한참 방치해두었다가 가볍게 써볼까 싶어 다시 생각했는데 또 게을러지네요.^^
    사라진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섭리이고 그 안에 내가 있으니 '위안'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더랬습니다.
    '순간'에 집중하며 살려하고 있습니다. 순간에는 존재만 오롯이 빛나 장애도 비장애도 없고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도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대개 창문으로 보는 가을 하늘이지만 그 맑은 파랑이 참 좋습니다. 깊어진 이 가을,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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