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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10. 16. 14:26

20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 김명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이자 시인, 번역가, 언론인, 배우였던 김명순은 도쿄 국정여학교 유학 시절, 19세의 일본군 소위 이응준에게 데이트 강간을 당한다. 자살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학교에서도 재적당해 귀국해야만 했다.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당한 것으로 왜곡 보도했고, 김동인은 김명순을 모델로 한 <김연실전>에서 주인공 연실은 ‘정조관념에는 전연 불감증인 음탕한 여자'로 묘사했다. 당시 남성 문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그의 삶은 피폐하고 곤궁해져 비참하게 살다 1951년 도쿄의 한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16  ‘반영구적’이란 어느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 걸까? 어떤 상태가 시간상으로 무한이 이어짐을 뜻하는 ‘영구’, 그러니까 ‘무한’의 반은 얼마 만큼일까? 무한의 반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 결론내리기를,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겠구나.

 

15  그의 노래를 들은 적 없고 연기도 본 적 없다. 브래지어를 거부하며 자기 자신으로, 자유로운 여성으로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는 와중에 페미니스트적이라는 이유로 한남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간혹 듣기는 했다. 그런 그가, 가수이자 배우였던 설리가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등졌다. 아니, 찌질한 한남이 주도하는 이 사회가 그를 죽였다. 기자들이 앰뷸런스에 실려 온 그를 찍으려 달려드는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죽음에 몰려든 벌레들. 이 나라가 지옥이구나. 미안해요. 설리. 평안하시길.

 

14  하늘이 맑고 파란 가을이었다. 멀리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서 목조주택을 짓고 있었다. 팀장의 블루투스에서는 윤밴의 <나는 나비>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오후 휴식시간 10분 전이었다. 바삐 스터드 사이에 방화블록 자리를 체크하다 뚝 떨어졌다. 척추가 뚝 부러지고 그 안의 척수도 뚝 끊겼다. 만 4년 전 오늘의 일이다.

떨어져 신경이 끊어지며 하지가 마비된 순간에 나는 낯선 세계로 옮겨갔다. 색다른 우주에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평선만 보이는 어둡고 춥고 텅 빈 곳이었다. 침울하고 삭막했다. 자책에 울고 좌절에 뒤척였으나 큰 무리 없이 적응해나갔다. 비었던 공간도 내 마음과 몸의 움직임에 따라 조금씩 채워졌다. 무엇보다도 방치한 채 따로 살았던 ‘나’를 만나 살피기 시작했고, 아내와 아이와도 긴밀해져서 비로소 그들의 아픔과 바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어보려 애썼고, 내 존재를 긍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고 전의 삶에 비해 지금이 훨씬 만족스러운 삶이라고 실감하며 살고 있다.

그럼에도 요즘 왠지 뒷목이 서늘하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따라다니고 있는 것처럼. 정체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하다 짐작해본다. 절망이 아닐까? 깊은 절망이 이렇게 속삭이고 있는 건 아닐까? 죽을 만큼 진하게 앓고 건너갔었어야지. 깊은 밑바닥까지 내려갔었어야지. 적당한 좌절과 적당한 슬픔으로 생색을 내며 스리슬쩍 비겁하게 상황을 넘긴 채 살아가고 있잖아. 그럴싸하게 나를 비켜갔잖아. 언젠가 꼭 한 번은 나를 만나고 겪어야만 하는데.

희망보다 절망이 더 어렵다니.

 

11  양평군립미술관이 기획한 <2019 청년작가 도큐멘타전 - 올해의 청년작가 발굴> 전시에 무려 ‘청년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양평에 거주하고 있는 25세에서 40세 사이의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취지의 전시. 출품 요청이 왔을 때, 내 나이 이미 쉰이 넘었는데 청년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실무자는 ‘연식에 비해 구력이 딸리고 인지도가 낮아 청년작가일 수도 있다’는 의미의 말을 완곡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답했다.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말했다. ‘아이를 위해 한 번 청년이 되어보는 건 어떻겠소?’ 하여 잠시 청년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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