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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10. 31. 21:35

30  지난해 3월, 10년 만의 개인전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책 한 권, 아니 단 한 쪽 읽지 않았다. 그동안 두 번의 개인전을 치루고 몇 건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노상 그림에 쫓겼다. 초짜처럼 긴장하며 자투리 시간을 내지 못했고, 마음도 빡빡해서 여지가 없었다. 양평 전시에 출품하고 나서야 비로소 여유가 생겨 독서란 걸 다시 시작해볼까? 페북에 올라온, 페친들이 쓰거나 소개한 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데 아내가 말했다.

“책 좀 주문하려고 하는데 읽고 싶은 책 있소?”

핸드폰 메모장에 적어둔 목록을 찾아 건네주며, 페친들이 쓴 책들인데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까? 머뭇거리자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난 누군가 당신 그림 사면 좋더만. 사서 읽읍시다.”

그 책들이 오늘 도착했다. 좀 설렌다.

 

[불편한 온도] 하명희 / 강 / 2018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황규관 / 문학동네 / 2019

[무정에세이] 부희령 / 사월의책 / 219

[문 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김미희 / 글항아리 / 2019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권김현영 / 휴머니스느 / 2019

 

27  생전 처음 ‘작가와의 만남’이란 걸 가졌다. 심히 조촐했다. 낯설고 비현실적인 풍경을 통해 현실 속에서 개인이 겪는 불안과 부유浮游, 곤란과 상실, 눈물과 소외 등을 환기시키려 했다고 말하며 대화를 시작했고, 말끝에 살짝, 보일듯 말듯 ‘희망’을 언급했다. 사회자는 덥석 ‘희망’을 물었고, 그것을 굴려가며 마치 희망이 내 작업의 시작과 끝인 것처럼 부풀렸다. 내가 말하는 희망은 아주 작은, 끝에 나타나는 최소한의 것이라 했지만 그의 말발에 밀리면서 희망을 말하는 작가가 되어버렸다. 거참, 희망이 전면에 서면 절망과 아픔이 사라지고, 그런 밝고 화사한 희망은 삶이 제거된 관념에 불과한 것을.

 

24  동생이 왔다. 인감도장을 전해주며 말했다. 계약했네. 내년 봄에나 잔금을 치른다고 하니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아버지 생신, 김장, 엄마 생신, 내년 설은 홍천에서 지낼 수 있겠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원소리 집은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되었다. 엄마는 무서워 혼자 지내실 수 없었고, 자식들 누구도 당장의 삶을 접고 그 산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급격히 가라앉고 땅은 정글이 되는 법. 고민 끝에 부동산에 내놓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임자가 나타나버렸다. 집이 팔렸다고 계약하러 간다고 동생이 소식을 전했을 때, 돌아가실 곳이 사라진 엄마는 우셨다. 형제들 각각의 삶 속에서도 한 시절이 곧 마감될 것이다. 인연이란 게 참 무상하여 서글프지만 꽃과 나무와 농사와 함께 풍요로운 아버지의 노년으로 기억될 것이니 다행이다.

 

22  ‘국가’라고 하면 나라라는 것이 분명 사회구성체의 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국익’이라는 말 속에서는 도저히 ‘국가’를 상상할 수가 없다. 수많은 층위의 계층과 계급이 존재하는 국가라는 단위에서 국익은 도대체 누구의 이익인가. 국익이란 지금까지 대개 권력과 자본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던 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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