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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11. 15. 11:45

20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접하게 되는 타인들의 수많은 정보와 주장과 분노와 체념과 의견과 선동과 취향과 일상들. 그 접점에서 보아야 하는 건 타인들이 아니라 바로 나.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일 뿐.

 

19  복지회관 재활치료를 마치고 마중 나온 아내의 차에 옮겨 탔다. 휠체어를 접어 뒷좌석에 넣고 운전석에 앉은 아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휠체어 출입이 가능한지 묻고는 출발했다.

원 :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다니까 오랜만에 외식이란 거 한 번 해봅시다. 쉬자파크 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인데 뷰가 죽인데. 강도 보이고. 찜해두었었는데 남편 말고는 같이 갈 사람이 없네.

나 : 연애 좀 해보시지? 음........ 당신은 남자보다 동성과 죽이 더 잘 맞을 것 같으니 남자 말고 동성으로. 친구 말고 연애 말이야.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원 : 뭔 뜬금없는 연애? 그것도 동성? 뭐, 가능하지. 나 바이잖아. 매력적인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지.

나 : 그러니까. 그런데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연애라는 게 대개 성적인 것들을 염두에 두게 되잖아. 그건 어때?

원 : 경험은 없지만 거부감이 들지는 않아. 별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사람 나름이지만 여자가 더 부드럽고 섬세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성보다 서로의 몸을 더 잘 아니까 교감이 더 깊을 것도 같고.

나 : 됐네. 그럼. 한남 말고 동성과 연애를 해보시구랴. 같이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정도 나누고. 쇼핑도 하고. 남편이란 놈이 못해 주는 것들 하면 좋잖아?

원 : 됐네요. 시간도 없고 에너지도 딸려. 연애할 만큼 매력적인 사람도 주변에 없고. 할 일도 많은데 부러 연애하자고 사람 찾아다니는 것도 귀찮고. 남에게 떠넘기려 하지 마시고 남편이 좀 더 다정하면 좋으련만.

나 : 물리적으로 내가 못해주는 것들이 있으니까.

원 : 퇴원할 때 말했잖소. 할 수 없는 걸 하려 하지 말고, 하지 못한다고 마음 쓰지 마시라고. 그냥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고. 그거면 충분하오만.

국도에서 벗어난 차는 용문산 기슭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풍경은 가을이 깊다 못해 절절했다.

 

18  지난달에 정엽선배의 도움을 받아 오산시립미술관 소장품 구입 공모에 두 점 응모했었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 연락이 왔다. 한 점이 선정되었으니 조만간 계약 서류와 그림을 들고 방문하란다. 선정된 그림은 [집밖의 집]. 기뻐하는 원의 모습이 무엇보다 좋았다. 아껴두었던 화이트 와인으로 자축했다.

 

17  휴일. 비가 추적추적 내려 어둑한 한 낮. 원과 선물 받은 수제 맥주를 마신다. Haze Pale Ale과 Brut IPA. 일반 맥주와 비교할 수 없는 풍미다. 맥주를 마시는 게 아니라 정성과 시간을 마시는 것 같다. 그 맛이 참 좋다.

 

16  ‘먹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요즘 먹는 순간에 집중하며 음식의 맛을 느끼려 하고 있다. 삶을 좀 성의 있게 살기 시작하려는 걸까?

 

15  하루 종일 늦가을 비가 내린다. 날씨 때문인가, 두 다리는 비에 젖은 듯 무겁고 평소보다 더 저리다. 매트 위에 올라 발을 주무른 뒤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는데, 며칠 째 집안을 날아다니고 있는, 아이가 ‘구름이’라고 이름까지 지어준 파리가 발에 착륙한다. 여섯 개의 다리로 내 발의 굴곡을 따라 조심스레 돌아다닌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순간,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사라진다. 시간이 멈춘 적막강산이 된다. 순간이 사로잡힌 사진 위를 파리만 살아서 걷고 있다. 느낄 수 없는 촉감이 블랙홀처럼 소리와 시선도 빨아들일 수 있구나.

 

14  천일씨가 원주 가는 길에 들렀다. 집 근처 식당에서 순두부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중미산 기슭의 선어치고개까지 드라이브를 다녀왔다. 빵빵하게 볼륨을 높인 스콜피언스의 음반을 들으며. 하늘은 맑고 산과 나무는 각양각색으로 물든, 세상은 어느새 깊은 가을이었다. 스물 하나, 가을에 처음 종주했던 지리산이 떠올랐다. 그 짙은 갈색의 풀들, 붉게 물든 나뭇잎들. 바람과 하늘. 첩첩이 펼쳐진 산의 중첩과 운해. 종주기념으로 천왕봉 정상에서 입을 맞춘 장미는 오래전 세상을 떴다 하고 사부는 대전에 가죽공방을 차렸다 하는데, 나머지 세 친구는 잘들 살고 있으려나. 면면을 떠올리다 생각하기를, 그런데 그 기억들은 정말 내가 겪었던, 실재했던 일들인가? 과거의 기억들은 지금의 내가 꾸는 꿈은 아닌가?

 

13  전태일 열사 49주기. ‘노동 존중 사회로 전태일 열사의 뜻 계승’한다고?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귀 닫은 채 재벌들과 손잡고 노동관련 법안들을 개악하면서 무슨 어불성설인지, 원. 말만 번지르르 감성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에 일익을 담당하는 대통령이라니.

 

12  경인미술관 전시 작품 중 [호박]을, 목포 아트센터신선 전시 작품 중 [비빔밥2]를 구매한 이원형 샘이 카톡을 보냈다.

[양평미술관에서 그림 보고 갑니다. 벽에 못 본 그림들이 붙어 있어서 한참 보다 왔습니다. 좋은 작품 감사드립니다. 현관 앞에 맥주 두고 갑니다. 맛있게 즐겨주세요~^^]

연락도 없이 서울에서 양평까지 다녀가시다니. 더구나 맥주까지.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는 마지막 응원이 당근 같기도 하고 채찍 같기도 해 고마웠다.

 

11  골밀도 검사를 받았다. 골반 부위의 골밀도 수치가 정상 기준치에 미치지 못해 의학적으로 골다공증 상태라고 진단한 뒤, 투약 처방 여부를 고민하던 의사가 말했다. 하지마비 척수환자 대부분이 겪는 현상이죠. 기립과 보행이 불가능하니까요. 병리적으로 골밀도가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기립을 하지 못해서, 관절이 몸의 무게를 받지 못해서 뼈가 약해지는 물리적인 현상이라 딱히 약을 먹기도 애매하긴 해요. 그러면서 어깨를 올리고 표정으로 물었다. 어쩌시렵니까? 잠시 고민하다 약 없이 1년간 지내보겠다고 하고 증상의 속도를 늦추는 다른 대안이 있는지 물었다. 의사는 그나마 가장 중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동작이라며, 두 다리에 카포를 차고 워커를 잡은 상태로 기립해서 버티는 운동을 권했다. 물리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훈련했을 때도 쉽지 않아 포기했던 종목이었는데, 집에서 혼자 하기에는 낙상 등 위험 부담이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전문가 도움 없이는 좀 위험하기는 하죠, 말끝을 흐리며 멋쩍게 웃었다. 어찌라고. 췟!
지구에서 서식하는 몸이 중력을 외면해 탈이 날 줄이야. 진료를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용문에서 출발한 아내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춥지만 햇빛에 몸을 들이댄다. 태양으로부터 8분 20초가량을 날아온 빛들이 살을 투과하고 골반에 박혀 구멍을 메우는 상상을 한다. 이 귀한 것들. 그러다 문득 생각하길, 저 태양은, 우주에 존재하는 수천억 개의 은하 중에 하나인 우리은하, 그 우리은하에 떠 있는 수천억 개의 항성 중 하나인 저 태양은 언제까지 에너지를 만들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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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los250 2019.11.21 21:41 Modify/Delete Reply

    축하드릴 일도 많고 응원을 보낼 일도 많고, 부러운 일도 많네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요... ^^;
    이런 저런 소식 많이 올라와서 반가운데, 이제 진짜 겨울이고 연말이니 좀 게으르게, 그래서 편안하게 그리 한 해를 또 건너보시는 게 어떠하신지.. 겨울은 게을러지기에 정말 좋은 계절이지 않나요? ... ^^

  2. yaalll 2019.11.23 14:55 신고 Modify/Delete Reply

    양평미술관 그림 보내고 난 뒤 두 달 가까이 붓 한 번 손에 쥔 적 없이 게으르게 보내고 있어요. 생각도 게으르고 텅 비게. 몸은 굳으면 안 되니 계획적으로 움직이면서. 연말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너무 하는 게 없어 그나마 일기라도 쓰고 있는 중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칼로스님의 겨울도 게으르고 편안하시길. 그리고 따뜻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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