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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12. 10. 21:16

10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 _ 중아함경

 

09  팔이 부러진 후로 아이는 뼈에 좋다는 홍화액을 저녁마다 한 포씩 마시고 있다. 아내가 아이에게 홍화액이 담긴 잔을 주며 말했다.

“사온군, 사약을 받으라!”

두 손으로 공손하게 컵을 받아들며 아이가 말했다.

“억울하옵니다. 한이 맺힌 게 많아서 쉽게 죽을 순 없을 것 같사옵니다. 살고 싶사옵니다.”

 

08  하늘은 맑고 영상의 기온에 바람도 없어 산책하기 좋은 일요일. 아이를 꼬드겨 오랜만에 산책을 나선다. 아이가 팔이 부러져 깁스를 했던 여름 끝 무렵 이후 처음이다. 편의점 갈까? 묻자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본 아이가 대답한다. 아니. 살 게 없어. 하여 잘 가지 않던 길로 바퀴를 굴린다. 킥보드를 탄 아이는 처음에는 내 속도에 맞춰주다 답답한지 10미터 쯤 앞서가다 멈춰 나를 기다리고, 내가 다가가면 다시 출발하기를 반복한다. 낯선 길이 있어 우회전 해 접어든다. 직진해 가던 아이가 뒤돌아와 잽싸게 앞질러 간다. 도랑을 정비하면서 새로 난 길인 모양이다. 이 마을에 이런 풍경도 있었구나. 낯선 길에 서니 풍경이 낯설다. 그래, 고정된 풍경이란 건 없지. 내가 가는 길에 따라 다른 풍경이 계속 생겨나는 법이지. 기존의 마을길과 합류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가 어서 집에 가자고 재촉하며 말한다. 아빠, 이러다간 하루에 일 키로 가겠다. 엊그제 선물 받아 따끈따끈한, 막 하다가 나온 포켓몬 실드 게임이 하고 싶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몇 백 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를 지나고 고읍수퍼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아이가 뜬금없이 묻는다.

“아빠, 아빠는 언제 행복하다고 느껴?”

“갑자기 웬 행복? 글쎄....... 음....... 아빠가 일하러 집을 나갔다가 1년 반 만에 돌아왔잖아. 그래서 그런지 엄마랑 니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인사할 때, 그때 그냥 행복하더라.”

“그래? 그럼 매일 행복한 거네? 일요일 빼고.”

“그런가? 오! 정말 그러네. 그럼 너는 언제 행복을 느껴?”

“나? 매 순간에. 살아있는 매 순간이 행복이지 뭐. 봐,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산책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

말하고는 다시 킥보드를 타고 내빼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두 가지 생각이 일어난다. 아이가 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과, 출근했다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07  핸드폰 메모장 ‘그림’ 폴더에 ‘색과 명도가 다양한 어둠. 여행자. 그리고 미미한 빛’이라고 쓰다 문득 생각이 났다.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La Bohémienne endormie]. 찾아보았다. 1897년 작, 캔버스에 유채, 129.5cm x 200. 7cm. 고졸미랄까? 사자의 털까지 세세하고 꼼꼼하게 그렸으나 어설퍼 보이는 재현의 기교가 오히려 사실을 넘어서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지팡이를 들고 죽음처럼 쉬고 있는 여인과 사자는 하나인 것 같다. 양면성이 아니라 우주를 여행 중인 화해하는 존재인 하나. 장 꼭도는 이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단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은 그려진 시다. 아마도 이 사자와 강은 잠자는 여자의 꿈에 나온 것이리라. ……그녀는 인간 세상의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녀는 시의 비밀스러운 영혼이다.”라고.

 

06  아주 사소한 기쁨 2 _ 하루 네 번 소변을 뽑는 시간. 500ml 내외의 적당량으로 나온 소변이 맑기까지 할 때.

 

05  <자신의 고향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초심자일 뿐, 어느 곳엘 가도 고향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그러나 진정 완벽에 이른 사람은 온 세상을 낯선 곳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 빅토르 위그

 

04  아이와 제 여권사진을 찍고 온 지난주부터 아내가 노래를 불렀다. 이발하러 가자고, 나선 길에 당신 사진도 찍자고. 여차저차 미루다 더 추워지기 전에 해치우자며 읍내로 나섰다. 찰스헤어에서 귀를 덮었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양평사진관으로 갔다. 사진사는 생전 해본 적 없는 2:8로 가르마를 반듯하게 나누어놓고 사진을 찍은 뒤 포토샵으로 주름과 옆 턱살을 순식간에 제거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가 물었다. 10년 만에 여권 사진을 찍은 기분이 어떻소? 답했다. 좋네. 이제 물 건너가는 일만 남았구랴.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올바른 자세로세. 진즉 그러시지. 이 지구에 와 살고 있으니 적어도 한 번은 국경을 넘어야 하지 않겄소. 나가봅시다. 까짓 거.

아내는 결혼 후에 난생 처음 해외로 떠났다. 보름가량 히말라야 트레킹을 한 뒤 내친 김에 네팔과 인도를 3개월 동안 홀로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 뒤로 태국과 일본, 캄보디아, 몽골 그리고 북한 등을 다녀왔지만 내가 가본 나라 밖은 금강산뿐이다. 사진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생각하기를, 쉰 넘어 휠체어 타고 찍은 이 사진으로 만들 여권, 과연 써먹으려나?

 

03  [겨울왕국 2]를 보고 온 아이가 유튜브에서 ‘Into the Unknown'을 비롯해 영화의 OST를 찾아 듣는다. 같이 듣는데 뭔가 불편하다. 뭘까? 노래를 들으며 생각해보니 원인은 열창이었다. 혼신을 다해 최고의 가창력을 뽑아내는 그 열정이 불편한 거였다. 그 감정의 폭발이 버겁다고 해야 하나? 요즘은 단순한 비트에 간단한 악기로 말하듯 부르는 노래가 좋다. 아니 편하다.

페이스북에서 팔로잉을 하고 있는 이들 중에 대중음악의견가인 서◯◯◯씨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날 들은 앨범 리스트를 평점을 매겨 거의 매일 타임라인에 올려놓는다. 재즈와 월드뮤직, 팝, 가요, 크로스오버 등 대중음악 전반을 섭렵하고 있고, 시기적으로도 갓 나온 앨범에서부터 오래전 과거까지 아우른다. 그가 올려놓은 앨범 목록들을 복사해두었다가 시간이 날 때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보고, 그가 매긴 별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내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해 mp3 파일로 모아두고 있다. 처음에는 익숙한 옛날 노래나 흥얼거리지 말고 새로운 노래에도 귀를 기울여 감성을 환기시켜보자는 의도였지만 내 취향만 확인하는 셈이다. 나이 탓인가. 음악에 있어서는 점점 보수적으로 되어가는 것 같다.

말 나온 김에, 최근에 새롭게 알게 된 대중음악 뮤지션들 _ 강아솔 그냥 김사월 나이트오프 노선택과소울소스 니들앤젬 못 백현진 버둥 선우정아 성해빈 알레프 오핑 우효 신치림 이날치 이랑 이형주 임인건 정밀아 주윤하 크래커 태엽 Agness Obel, Alasdair Roberts, Aldous Harding, Alt-J, Amnada Palmer, Billie Eilish, Gigarettes After Sex, Devendra Banhart, Emma Tricca, Haven, Hailey Tuck, Haley Heynderickx, Hamish Kilgour, Hindi zahra, Isaac et Nora, Katie Melua, Madison Cunningham, Oum, Sales, Sophie Zelmani, The Be Good Tanyas, The Staves, Tram 등등

 

02  꿈을 꾸었다. 벽제 집인 것 같다. 엄마와 동생과 같이 있다. 내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는다. 비틀거리며 조심조심 발을 옮긴다.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쓴다. 처음에는 휘청거려 위험했지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조금씩 안정적인 걸음을 걷는다. 나도 엄마도 동생도 놀란다. 믿겨지지 않아 전진하는 맨 살의 다리를 계속 내려다보며 집을 걸어 다닌다. 꿈속에서는 대개 다치기 전 비장애인이었을 때처럼 걷고 뛰고 타고 운전했다. 오늘처럼 휠체어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한 건 처음이다.

 

01  요즘 오전과 오후 한 번씩 매트 위에서 엉덩이를 식히는 시간에 불교 관련 강의를 듣는다. 석가모니가 깨닫고 설파한 연기와 공, 무상과 무아.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이론이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인 줄 알았는데 달리 생각해보니 지금, 여기의 삶을 잘 건너가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나 지침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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