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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1. 8. 16. 10:10

모처럼 갠 날.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장화를 신고 새로 산 낫으로 주변의 풀들을 벤다. 이곳으로 온지 석 달 넘게 바라만 보고 있었더니 풀들이 쑥쑥 거침없이 자라 무성해졌다. 나는 그게 보기 좋았는데 사람 살지 않는 폐가 같다며 마을 할머니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질경이도 별꽃아재비도 달개비도 개망초도 다 늦은 애기똥풀도 그 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풀들도 내 손에 잘려나간다. 하여 주변은 봉두난발을 단정히 이발한 것처럼 깔끔해진다. 수고한다고 수박을 들고 오신 앞집 할머니께서는 “내 속이 다 시원하다”며 덧붙이시길 “잡초들은 부쩍부쩍 자라니 뿌리까지 뽑아야 혀. 그래야 뒷일이 없지.”
이 흔하고 낮으며 보잘 것 없는 것들. 나와 닮았다 여기니 차마 뿌리 채 뽑아내지 못하고 낫을 휘둘러 베어내며 속삭인다. 미안하지만, 또 자라거라. 뿌리가 있으니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귀하고 높고 수려한 것은 우리의 삶이 아니나 우린 끈질기다.(18)

집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른다. 오늘도 집은 백운봉과 함께 운무에 감싸여 있다. 저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가면 운무는 잊고 젖어 있는 집을 걱정하겠지.(17)

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이야기 끝에, 아버지께서 종이 한 장을 들고 오셔서 보라 주신다. 굵은 고딕체로 프린트 된 종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녕하세요? 더운 날씨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간간히 뵈옵는 선생님 모습은 너무 멋집니다. 저도 반드시 나이가 들 테고 그렇다면 선생님 모습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금꽃나무]라는 도서를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 뜨거운 햇볕 아래서 노동의 진정성을 되찾고자 200일 넘게 크레인 위에서 투쟁하고 있는 김진숙이라는 사람의 글입니다. 선생님 같은 분께서 읽어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건강, 또 건강하세요!^^
홍천읍에 있는 아버지 단골 서점의 '점원아가씨'가 책 한 권을 선물로 주며 함께 건네준 메모. 아버지께서 덧붙이신다. "늙고 사람 만나는 일이 없으니 누가 나를 어찌 보던 신경 쓰지 않고 살지만 나를 보고 아름답다 하니 기분은 좋더구만."
아버지를 멋지고 아름답다고 여기며 [소금꽃나무]를 선물한 젊은 아가씨와 메모를 보며 흐뭇해하시는, 박정희를 흠모하며 이명박을 옹호하고 늘 한나라당을 지지하시는 아버지....... 잠시 당황스러워 하다 이야기 주제를 돌린다. "제천 한 번 가보지 않으실래요?"(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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