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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0. 12. 13. 13:33

하덕규가 소리친다. ‘비둘기 안녕, 비둘기 안녕, 비둘기 안녕’ 나도 속으로 소리친다. '비둘기 안녕, 비둘기 안녕, 비둘기 안녕' (18)

장 프레포지에가 쓴 [아나키즘의 역사]를 빌려 읽기 시작했다. 재미있다. 역사적 근원과 인물들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언급한다. 그에 대한 한 대목.
헨리 소로우는 민주주의의 약속을 거의 믿지 않았다. 숫자상의 우위를 앞세운 다수의 권력이 형평성의 원칙을 좇아 소수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사실상 그것은 최대 다수를 바탕으로 설립된 정부의 권위로, 이 권위는 선악의 기준을 결정함에 있어 독점권을 가로챈 정부에 의해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우선권과 동등하게 취급된다. 그런데 소로우는 시민들이 기성세력에 의해 마련된 제도나 규칙들 속에서 정부에 무조건적인 존경과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게 되고, 이러한 수동성 때문에 국가의 범죄 기도(개인권 침해, 전쟁, 종교 또는 인종박해 등)에 공모하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가운데 명민한 개인은 국가가 행하는 일들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판결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각 개인은 올바르지 않거나 범죄라고 판단한 명령에 불복종할 권리-또는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 소로우는 우리에게 정치적 반항이 군사적 불복종과 짝을 이루게 됨을 보여준다. 사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과 급진적 평화주의자들에게 군사적 불복종을 가르친 것은 그였다.
이“콩코드”사람이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싸움에 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자. 그는 흑인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3)

오며가며 노트에 그려놓은 밑그림들을 훑어보려 뒤적이는데 메모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김현 선생이 [전체에 대한 통찰]에서 시인 김춘수에 관해 쓴 글 중 한 구절. 노트에 옮겨 적을 때도 그랬었겠지만 마치 지금의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깊이를 팔 때도 그는 말라르메처럼 고뇌한 적 없고 주위로 눈을 돌릴 때도 진정한 휴머니스트들처럼 고뇌한 적도 없다.(.......) 다만 그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러나 정말로 ‘그렇게 살지’ 않는 한 그의 언어는 우리에게 와서 ‘꽃’이 되지 않는다. 항상 가화가 될 뿐이다. 그는 사는 방법을 모르는가. 아니다. 그는 다만 피해갈 뿐이다. 그러므로 탐구로서의 언어는 기교로서의 언어로 그렇게 쉬 바꿔진 것이 아니겠는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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