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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1. 1. 3. 11:28

나이를 먹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 / 너그러워지는 대신 칼날처럼 좁아져서 / 내 해묵은 비망록 너덜대는 빈칸엔 / 용서하지 못할 자들의 이름이 더 늘었다.

신경림 선생의 시‘새해가 되어도’중 일부다. 선생이 대략 쉰에 접어들 무렵에 쓴 글이다. 해를 넘기며 비슷한 생각을 했다. 나이가 들면서 너그러워지고 시비에 연연해하지 않고 넓어지기는커녕 더 날카로워지고 아집이 늘어가는 것 같고 용서 못할 일과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고. 꼰대가 되가는 건 아닐까? 하고.
오늘 아침 정희성 시인의 시를 읽었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라는 시 말미에 그는 이렇게 썼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 나는 자유를 위해 /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고. 얼버무리고 뭉뚱그려 허 허 - 웃으며 온유해지는 게 지혜는 아닐 터. 이 땅의 수많은 꼰대 중 하찮은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10)

사는 일이란 이성과 논리로 해석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삶과 마주 선 태도의 문제다. 도구화 되고 박제화 되어 번지르르한 이성을 따르느니 내 심중을 좇겠다.(06)

오랜만에 재즈를 들으며 가다 버스에서 내리니 Ron Carter가 말한다. 무심히 작업실에 들면 되겠는가. 날이 춥네만 내 가락을 들으며 잠시 걷게나. 하여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있다. 놀이터에 소복이 쌓인 눈에는 고양이 발자국만 점점이 찍혀 있고 숲은 여전히 설경이다. 얼어 떨어질 수 없었는지 붉은 산수유 열매가 치렁치렁 달려 있다. 까치 한 마리 전깃줄에 앉아 산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한다. 얼굴은 얼얼하고 몸은 으슬하다만 네 마음을 걷는 듯 묘한 느낌이다.
마흔을 넘고 있는 네 생각을 한다. 나도 앓으며 넘었던 고개이니 그 무게, 이해할만 하다. 허나 네가 넘는 그 고개가 어둡고 오리무중이어서 분간할 수 없다는 것.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라는 것. 나이에 연연해하지 않는 네가 힘겨워 하고, 내가 마음 아픈 이유다. 내가 네 눈을 가렸는가? 부인할 수 없다. 분발한 만큼, 늙어가는 만큼 정량화할 수 없는 미래........ 마흔을 넘으며 생각했었다. 무작정인 희망은 후회보다 못하다,고. 나는 여전히 너를 근거 없는 희망으로 꼬드기는가? 아니라 말하지 못하겠다.
어느새 작업실 문 앞에 다다른다. 작업복을 갈아입고 누군가의 뒷모습들을 그릴 것이다. 보편적인 등에 얹힌 상징적인 삶의 무게라 여기며 뭉뚱그려 은유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어제 주물렀던 훌쩍 푸석해진 네 등, 개별이고 현실이며 직유인 네 몸. 어쩌면 하루 종일 그 생각에 빠져 붓을 못 들지도 모르겠다.(07)

아버지가 화가 김병종이 쓴 [화첩기행]을 읽어보라며 주셨다. 지은이가 그려 넣은 그림들은 영 마음에 안 들더라만 글은 읽을 만 하다고 덧붙이셨다. 예술가와 그들이 나거나 자란 곳을 연결해 쓴 수필 같은 인물전.'김대환과 인천'편 중 한 대목이다.

오히려 그는 음악을 좋아는 했지만 재능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간파했노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재능에 기대기보다 연습에 몰두하는 쪽을 택했노라고. 그의 ‘연습’은 실로 독한 데가 있었다. 밤무대가 끝나는 새벽 세 시에도 하숙방으로 가서 쓰러지는 대신 악기 창고로 들어가 자물쇠를 채우고 동이 트도록 드럼을 두드렸다. 한 때는 사람들과 말하며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혀끝을 잘라버리고 연습에 몰두하기까지 했다. 스틱을 쥔 손마디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보고서야 연습을 그치기가 예사였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면 바로 이 연습 재능일 뿐이라며 그는 소년처럼 웃는다.

없는 재능에 대한 고백이라면 나도 늘 해왔고, 타고난 재능이 없음을 탓하거나 탄하지는 않았다. 허나 흑우黑雨처럼 피를 보며 나를 갈고 닦아 보지도 않았다. 하여 이제야 '독한 연습'이 없었던 지난날들을 뉘우친다. 어쩌겠는가. 늦었더라도 시작할 밖에.(03)


장을 보러나온 태홍이 전화를 했다. "갑시다". 종무식을 서둘러 마치고 옥수에서 만난다. 아무 준비 없이 나섰던 태홍의 손에는 갓 구입한 기저귀 한 꾸러미가 들려 있다. 상봉에서 경춘선복선전철로 옮겨 타 강촌에 내려 택시로 원소리에 도착한다. 오고 가며 이용한 경춘선복선전철은 스쳐지나가는 눈 쌓인 풍경이 위로해주었을 뿐 무미하고 건조했다. 속도와 통합시스템에 의해 여유와 사소함이 사라졌다. 턱을 괼 수도 없고 의자 깊숙히 나를 숨길 수도 없으며 맥주 한 캔 홀짝일 수도 없으니 오히려 더욱 속도를 높여 어서 내려주기를 바랐다.
오고 가는 해를 원소리에서 보내고 맞이 하기는 참 오랜만이다. 막걸리를 마시며 새해를 맞이하는 게 갈수록 심드렁해진다 했더니 아버지 말씀하시길 "그저 하루, 하루가 있을 뿐". 저물고 있는 아버지는 정말 그저 하루하루일 뿐일까?

아침부터 온이와 함께 눈사람 만든다 비료부대 눈썰매를 탄다, 소란스러웠지만 뭉쳐지지 않는 매눈인지라 별무소용. 추우니 들어가자면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 놀아요"를 되풀이하는 아이는“펄 펄 눈이 옵니다 ~”노래를 부르며 눈을 집어 위로 던지기도 하고 눈밭에서 뒹굴뒹굴. 막대기를 들고 눈 위에 말도 되지 않는 선을 끄적인다. 뭘 그린 거냐 물으니 녀석은 말한다. "악어".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근본이야 어쩔 수 있겠느냐만 눈 속에서 웃는 저 아이가 일상의 허무를 걷어주는구나. 새삼 다짐들도 해 본다. 새해에는 색다른 나를 보고 싶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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