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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1. 4. 4. 11:35

옥상에 올라 둘러본다. 딱딱한 풍경 틈틈이 하얀 목련이 피어 밝다. 예전 같으면 멀리 있지만 그 목련들, 손으로 더듬고 쓰다듬었을 것을, 오늘은 왠지 무섭다. 꽃에게 쫓기고 있다.(10)

마음에서 화가 부글거린다. 본래 욱하는 성질이어서 때로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대체로 휙 -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헌데 요즘은 심저에서 부글부글 끓으며 지속된다. 이 일을 어찌할꼬? 딱히 대상도 없고 전례가 없던 일이라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 중.
그린비에서 보내주는 지블로그를 들고 나와 지하철에서 펼쳐 읽는다. ‘몸’을 공부하고 있는 고미숙씨가 말한다. 마음과 몸은 하나. 마음이 끓고 있는 건 당신 몸이 망가져있기 때문이랍니다! 몸을 먼저 보살펴주세요.(08)

친구가 달콤한 오십대를 상상하며 묻는다. 오십에 접어들면 여행 한 번 진하게 해야지. 그런 때가 온다면 당신은 어떤 여행이 하고 싶으신가? 내가 답한다. 물 건너 갈 생각은 없고 오래된 로망이라 체력이 받쳐줄는지 모르겠지만 이 땅 구석구석 천천히 걸어 다니며 자세하게 보고 싶어. 카메라와 노트북, 수첩과 엠피쓰리 플레이어 그리고 가능하다면 책 몇 권 담고서. 만일 해외로 나간다면 문명에 기대고 싶지는 않고, 에베레스트나 카스피해나 사막 같은 거대한 자연 쪽으로 가겠어. 늘 궁금하기는 하거든. 그런, 나를 압도하는 대자연을 보며 내 생각이 어떻게 갈라지고 정리될지.(06)

월세로 작업실도 계약했다.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사나사 계곡 아래 2층 양옥집이다. 친구가 땅을 구입해 작업실을 지을 때까지 살면서 내년 개인전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집과 작업실 모두 다음 달 초순에 옮길 테니 그 후로 서울에 발 담그는 일은 거의 없겠다. 쥐 죽은 듯 살면서 그림에 매진해야지. (05)

옮겨 일 년 동안 지낼 작업실을 둘러보려 친구와 함께 옥천 용천리에 와 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다 계곡을 따라 사나사로 오르는 길을 굼벵이처럼 간다. 차를 비켜 좁은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미안해 먼 산을 본다. 하늘이 맑고 풍광이 아담하고도 독특하다.
스치로폼에 스프레이로 아무렇게나 써놓은 ‘입구’라는 이정표와 그 입구에 샌드위치 판넬로 더덕더덕 짓고 있는 건물을 보니 올라오던 길의 감흥이 일순간에 가신다. 절이 이래도 되는가? 짓고 부수는 것이, 만들고 버리는 것이 참 쉬운 세상일진대 절이 뭐 특별하다고. 절을 한 바퀴 돈다. 작업실 지을 터를 찾고 있는 친구가 말한다. 용문산의 주봉인 백운봉 기슭에 배산에 임수에 남향에 널찍한 터에 그만인 가람이로구만.
입구 근처 쉼터에 앉아 절을 본다. 갤로퍼로 오락가락 하는 승이 큰 소리로 지휘하며 아무렇게나 짓는 조립식 건물이 눈에 걸려 차마 그 너머를 보지 못하겠다. 아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친구가 말한다. 승들이 수행을 하듯 제 몸으로 한 톨 한 톨 지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보시고 공양이고 불심일 터. 부처의 마음은 간 데 없고 행사만 난무하겠구만. 내가 답한다. 경제적 효용이 모든 것의 잣대인 세상이지. 그 기준에서 비켜나 진정이니 느림이니 이상이니 순진이니 마음이니 말하면 다들 ‘비현실적’이라 비웃지. 현실적이란 것이 뭐겠나? 잘라 말하면 결국 화폐 아니겠나?
다시, 짓고 있는 가건물을 보며 생각한다. 보다 많은 불자들을 수용해 보다 많은 공양을 거두어 절을 살찌우겠다는 뜻으로 읽는 내 마음이 팍팍한 걸까? 요즘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 대학은 대학재단과 교수들을 위해 존재하고 학교는 교육 관료들과 교사들을 위해 존재하고 공공기관은 공무원을 위해 존재하고 법원은 판검사와 변호사들을 위해 존재하고 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스포츠는 각 협회들을 위해 존재하고 기획사는 기획사를 위해 존재하고 종교는 종교재단을 위해 존재하고 미술은 미술계를 위해 존재하고 음악은 음악계를 위해 존재하고 국회는 국회의원을 위해 존재하고 정당은 정치인들을 위해 존재하고 농협은 농협 관료들을 위해 존재하고 은행은 은행 자본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들은, 학생이고 민원인이고 노동자이고 관객이고 시청자이고 고객인 우리들은 각 기관의 권력들과 그 추종자들로부터 소외된 일개 개인일 뿐이다. 심지어 우리는 세금을 내고 학비를 내고 입장료를 내고 소송비를 내고 헌금을 내고 이자를 내는 무리들에 불과하다. 뭐, 이런 생각들....... 이 견고한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우려는 게 아나키즘을 읽고 이반 일리히와 앙드레 고르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이 되니 날이 쌀쌀해진다. 털고 일어나 약속 장소로 간다. 내려가는 길, 산기슭에서 저녁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노란 생강나무꽃들이 나를 위로해준다.(03)

옥수수 심을 밭에 퇴비를 뿌린 후 삽으로 일일이 땅을 뒤집어엎는다. 지난해보다 많은 마흔 이랑. 아버지가 말씀하신다. “고마운 사람들에게 딱히 나눌 것도 없고 옥수수가 제격인 것 같아 더 심으려고.”
아이들은 햇살을 받으며 흙장난을 하거나 콩콩 뛰어다니고 어른들은 일에 막걸리를 곁들여 가며 가감 없이 웃고 떠든다. 그렇게 하루가 저문다. 모두 그저 고마울 뿐이다. (02)

양평읍 백안리 세수골, 방 두 개에 넓은 거실의 단독주택 1층을 전세 계약했다. 마을 입구 용문사 부설 어린이집에도 대기를 걸어놓았다. 어제 소개 받아 보고는 가격에 비해 실한 것 같아 함께 둘러보자고 간 태홍이 전격적으로 도장을 찍은 것. 사실 서울을 떠날지 말지 더 망설인 건 태홍이었는데 역시 모도니즘의 힘. 새로운 삶을 기대한다.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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