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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1. 5. 24. 21:06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자부했다. 생각해보니 그 ‘나름대로’는 일종의 내 합리화에 불과했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나름대로’를 자주 되뇌고 만족한다는 것을.(31)

집 안으로 벌레들이, 익숙한 녀석들부터 낯선 것들까지 수시로 드나든다. 개중 돈벌레가 으뜸. 내 사정거리 안에 있으면 잡고(잡는다고 순화해서 말하지만 사실 잡아 죽이는 것) 높이 있거나 보일 듯 말 듯 숨어 있으면 그냥 놔둔다. 벌레가 많다고 했더니 양평 생활 구 년째인 문목수가 답한다. “여름에는 뭐, 벅스 라이프지요. 공생한다 생각하면 마음 편해요.” 벌레들, 공생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나 아직 멀었으니 조심히들 다니시길.(29)

태홍에게 문자메시지가 왔다. 하루 반 나절이 라디오 주파수 잡는데 다 쓰이는구만요. 어쩌다, 드디어 잘 나오는 데를 찾았어요. 원하는 방송은 전혀 잡히지 않는다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한 군데라도 잘 나오는 게 어디인지. 지금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 봄날은 간다가 흘러나오네요. 이미자가 초대 손님으로 나와서 얘기도 하고 ㅋㅋㅋ 공장에서 일할 때 듣던 그런 분위기. 그나저나 저 놈의 대포 소리 좀 안들었으면 좋겠네. 수고요.(26)

김은숙, 그녀를 어떻게 불렀던가? 선배라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고 오래 전, 그녀는 내가 속해 있던 공공미술 연구소에 장편소설을 쓰기 위한 취재차 잠시 드나들었었다. 그녀는 벽화가 기획되고 그려지는 과정을 직접 보며 메모하고 술자리를 마련해 작가들의 의도와 생각들, 사회운동과 벽화의 관계 등을 물었었다.  한 해 뒤, 탈고된 그녀의 소설 [이성이 잠들면 요괴가 눈뜬다]에 벽화운동을 하는 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 모델은 그녀가 익히 알고 있던 연구소의 선배였다. 그때 그녀를 처음 보았다. 전설적인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을 주도했던 이답지 않게 조용하고 나긋했던 웃음과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후로 그녀를 본 적이 없다.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서울 창신동에서 봉제공장 노동자 등 저소득층 자녀들을 보살피는 지역아동센터를 열어 활동했다는 사실도, 지난해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오늘 그녀가 숨을 거두었다. 향년 52세. 숨지기 직전 가족들에게 "사랑해"라 소리쳤다고 한다. 편히 잠드시길.(24)

집과 작업실을 오고 가며 보는 풍경들. 쉼 없이 변하고 순환하면서도 변함없는 선을 보여주는 산과 숲의 선들. 모서리가 없어 편안하다. 즐기고 마음을 순화하되 편안함에 사로잡혀서는 아니 되지.(23)

희한하게 충주엠비씨가 잡히는, 잡음은 없으나 자막이 겨우 보일만큼 지직거리는 화면의 티브이로 나가수를 본다. 모두들 치열하게 보래를 부른다. 최선의 기량과 감정을 섞어 청중평가단과 시청자들에게 호소한다. 임재범이 압권이었는데 그의 열창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보인다. 그런데 나는 불편하다. 왜일까? 대범해도 어쩔 수 없는 경쟁 시스템 때문인가? 과하게 느껴진다. 넘쳐흐른다. 잔에 절반 조금 넘게 찬, 그 안에서 남실남실 울리는 그런 조용하고 차분한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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