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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2. 5. 3. 11:30

2차 옥수수 심을 밭에 거름을 주고 한 삽 한 삽 뒤집어엎은 후 벚나무 아래에서 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신다. 얼마 남지 않은 벚꽃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아이는 눈이다, 눈, 소리치며 꽃잎을 따라 뛰어간다. 꽃잎 세 장이 아버지 머리카락 위에 앉는다. 하얗고 화사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오래된 흰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붉고 어둡다. 그렇게 보인다.(28)

집을 나서 작업실로 걷는다. 공군관사를 지나니 용문산이 보인다. 어제 내린 비로 선명하다. 움직이는 구름 사이로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햇빛이 시시각각 다른 음영과 굴곡을 보여준다. 모르고 지냈는데, 저 산에, 저렇게 다채로운 선과 깊이가, 고저와 장단이, 농과 담이 있었구나. 변하는 한 순간 한 순간의 풍경들은 라르고와 안단테,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모데라토와 프레스토를 오고간다. 이 연주를 주도하는 것은 햇빛과 그것을 받아 반짝이는 연두다. 봄에, 저 빛나는 연두는 정말!(26)

대학 동문회에서, 과 동문회에서 가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행사안내나 경조사 알림이 대부분. 워낙 학연 등 집단 인연에 관심이 없는 터라 바로 삭제한다. 오늘 받은 문자메시지는 총장배 골프대회를 열겠으니 홈피를 통해 신청하라는 것. 이런 말이 툭 튀어나온다. 끼리끼리 모여 골프는 무슨. 미친.(25)

아침, 깊은 안개에 혹해 마을을 걷는다. 길은 이내 사라지고 용문산은 보이지도 않는다. 땅을 뒤집어놓은 논들도 이랑이 가지런한 밭들도 모두 그 끝을 모르겠다. 길가의 벚나무들은 천천히 페이드 아웃되며 사라지는 제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안개는 몽환적이고 은근하다. 그렇게 세상을 가린다. 가려진 것들을 잊지 말자고, 현실의 선명한 것들을 스스로 가리지 말자고 채근하면서도 때때로의 안개, 그 오리무중은 그래서 매혹적이다. 막막한 휴식과도 같다.(24)

집 벽시계는 무소음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는 소리에 민감해 굳이 택한 것. 하여 필요에 의해 볼 때 외에는 시계를 잊고 산다. 일찌감치 누워 말똥말똥 껌벅껌벅 눈 뜨고 있는데 어둠에 익숙해지니 시계가 보인다. 그리고 순간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너, 정말, 소리 없이, 가고 있었구나!(22)

오늘 점심은 무얼 해 먹누, 생각하다 양푼을 들고 작업실을 나선다. 주변에 제멋대로 자라는 부추를 뜯고 제비꽃, 민들레, 광대나물, 별꽃, 돌나물 잎들을 딴다. 엊그제 심은 잎채소의 여린 잎들도 조금 곁들인다. 깨끗이 씻어 고추장과 참기름, 깨를 넣고 살살 버무려 밥을 얹고 비빈다. 맛나지도 맛없지도 않다. 그 과정이 즐겁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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