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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2. 5. 11. 10:16

요즘 작업실 옆 밭에 심은 잎채소의 잎들을 따 씻은 다음 밥과 된장을 얹어 비벼 한 끼 뚝딱 해결하곤 한다. 워낙 먹고 입는 데 별 관심이 없어 그런가? 맛보다 그 간소함과 담백함이 좋다. 다음 끼니 때가 되면 배가 헛헛한 것도 좋고.(09)

나는 이 죽음이 마구간에서 자기 말을 끌고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 나는 헛간 바닥에 닿는 말 발굽소리를 듣는다. / 그는 서두르고 있다. 그는 쿠바에 볼 일이 있고, 발칸반도에도 / 볼 일이 있고, 오늘 아침에 방문해야 할 곳이 많다. / 그러나 나는 그가 말의 배댓끈을 죄고 있는 동안 / 말고삐를 잡고 있지 않겠다. / 그는 혼자 말에 올라타야 할 것이다. / 왜냐하면 나는 그의 한 쪽 다리를 올려주지 않을 테니까. // 그가 채찍으로 내 어깨를 갈긴다 해도 나는 / 그에게 여우가 어느 길로 달아났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다. /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죽음을 위해 해줄 것은 그게 전부다. / 나는 그에게 고용되어 있지 않다.
- 빈센트 말레이 '양심적 병역거부자' [장석주「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 갔을까?」150쪽, 재인용](07)

양평으로 내려온 지 한 해가 지났다.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정착을 위한 통과의례라면 그 고단함 쯤 견딜 수 있었을 텐데 일종의 공황과도 같아 힘에 부쳤다. 시간과 노동과 정신, 그리고 수백의 돈이 그저 소모되었다. 시련을 통해 단단해질 때도 있지만 아프기만 할 때도 있다. 우리가 그러했고 태홍은 더욱 그러했다. 세 번의 이사 끝에 안정이 되었지만 그다지 믿음직스럽지는 않다. 하여 다른 삶을 계획하려 한다. 영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양평은 신기루 같은 경유지가 될 것이다. 어쨌든 견뎌낸 태홍에게 고맙다.(04)

봄 가뭄이 한창일 때(한 달 동안 비 한 방울 안 왔어요) 산림청에서 산불 내지 말라고 야단법석 떨면서, 산을 허물고 깎는 건 한마디 말도 없어요. 그건 허가하고 허가 받은 일이랍니다. 누가 허갈 합니까? 산을 인간이나 국가가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과 나라 몫으로 만든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인간이 저희끼리 치고 받고 죽여도 한이 차지 않아 이제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고 있습니다. '◯◯국립공원' '◯◯도립공원'이란 팻말 보면 기가 막힙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가 산을 만들었나요? 그 팻말 붙여 놓고 산을 막 깎고 드러내고 있습니다. - 전우익, 「사람이 뭔데」 63쪽(03)

머뭇머뭇 하다 보니 어느새 오월이다. 크로노스, 시간의 신이다. 날개를 달고 큰 낫을 들고 있다. 날개는 재빨리 사라지는 시간을 의미하고 큰 낫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만물의 생명을 앗아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누이 레아를 아내로 삼아 여섯의 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삼켜버린다. 이 또한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킨다는 자연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크로노스가 삼킨 자식들을 뱉어내게 하고 그를 추방하는 것은 제우스. 막내로 태어났지만 레아의 기지로 삼켜지지 않고 자라 아버지인 크로노스의 배 속에 있는 형과 누이를 구해내고(그들은 배 속에서 자라지 않아 제우스 보다 어리게 된다) '가장 먼저 된 자'가 된다. 크로노스, 즉 시간을 이겨냈으므로. 크로노스는 자식들을 뱉은 후 말했다 한다. "삼킨 것을 토해냈으니 나는 이제 시간의 신이 아니다. 네 마음대로 처분하여라."
제우스가 크로노스의 낫과 날개를 꺾고 그를 내쫓을 때도, 시간을 이겨내고 신 중의 신이 되었을 때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으리라. 삼킨 것을 토해내듯 지나간 시간을 지나가지 않은 시간으로 되돌릴 수 는 없는 일. 붙잡아 둘 수도 없는 것. 일 분 일 초가 소중한 요즘이지만 머리와 몸은 늘 따로 돌아간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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