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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3. 5. 7. 10:32

물과 언덕 사이에 길이 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그렇다고 그 중간은 더더욱 아닌 경계. 그것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때와 더불어’변화하는 어떤 지점일 터이다. 오해해선 안 될 것은 이 사이는 ‘중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양극단의 ‘가운데 눈금’이 아니라 그것과는 전혀 다른 제3의 길. 그것이 바로 ‘사이’의 특이성이다. -고미숙,『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317쪽(29)

퇴근하는 길. 양정역과 덕소역 중간 쯤. 전철 창문 밖으로 하얀 배꽃이 늦은 햇빛에 밝게 빛난다. 순간 코끝이 찡하다. 이십대에 드나들던 디귿의 작업실이 여기 있었지. 그때를 몸이 기억하고 있구나. 그러니 생각 없이도 울컥하겠지. 그곳을 오고 갈 때 지나다녔던 배나무 밭. 따뜻한 햇볕과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다 떨어지고 말던 흰 배꽃 잎을 보며 분명 방랑을 꿈꾸었을 허허로운 표정. 섬과 섬을 홀로 오고가던 결핍.......(26)

대상을 투시하는 예리한 시각, 끈적하게 들러붙는 촉감적 능력은 잠행자만의 특이성이다. 대열을 일탈하여 솔로로 움직이고, 대열이 잠들 때 깨어 움직이는, 말하자면 지루하게 반복되는 리듬 속의 ‘엇박’같은 존재. - 고미숙,『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151쪽(24)

꿈 이야기. 회사에 취직해 첫 출근을 한다. 고전적인 빌딩인데 그 내부 경로가 비밀스럽고 복잡하다. 무표정한 프론트 안내원에게 길을 묻자 고개만 까닥이며 지시하듯 방향을 가르쳐준다. 30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헌데 가만히 보니 내 복장이 황당하다. 웃옷은 맨몸에 양복을 걸쳤고 아랫도리는 츄리닝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세 명의 직원이 무표정하게 쳐다본다. 사무실 한 가운데 벽에 표어처럼 「오지도 극지도 아닌 늦지 프로젝트」라 쓰여 있다. 한 직원이 내게 다가와 말한다. “여기는 타규멘터리 제작 회사인데 늦지 탐험대라고도 하지요. 사람들의 후회를 취재해 다큐로 만들어요. 그래서 늦지!”내게 주어진 업무는 스틸컷 촬영. 첫 취재 지시가 떨어지자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뒤를 따라 사무실을 나서다 잠이 깬다. 늦지 프로젝트? 괜찮은 아이템인데, 스토리를 만들어볼까?(23)

어디서 발췌했는지 알 수 없는데 노트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그는 보드랍고 정밀한 근육 덕분에 소리를 내지 않고 걸을 수 있고, 있는 듯 없는 듯한 발자국을 남기며 달릴 수 있다.”- 아름답다. 보드랍고 정밀한 근육이라니. 그리고 가볍다니!](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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