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1

노트 2016. 9. 2. 09:43
08. 기립기에 서서 면동초등학교 건물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학교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생각한다. '저 사람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고 느끼는 세상과 다르다. 나는 저 사람이 보는 세상을 볼 수 없고, 저 사람 또한 내가 보는 세상을 전혀 볼 수 없다. 저 사람과 나 뿐이겠는가. 존재하는 만물은 모두 다 서로 다른 세상을 본다. 오직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생을 꾸려간다. 원의 세상이 나의 세상과 다르고 온의 세상 또한 내 세상과 다르다. 지렁이도 코끼리도 군함조도 마이클도 초파리도 해왕성도 야마모토도 너럭바위도 서로 다른 각자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두더지도 심해말미잘도 베텔기우스도 소나무도 하루살이도 곤잘레스도 달개비도 모두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만물은 모두 서로 다른 세상을 보고 느끼고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무엇이든 똑같은 세상을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고정된 세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고 만물에 상응하는 도량형만큼의 주관적인 세상이 있을 뿐인가?'

05. 지난해 초부터 가지고 다니던 노트 한 권를 이제야 다 썼다. 핸드폰에 메모를 하게 되면서 소원하게 지내 오래 걸렸다. 이 노트에 뭔 짓을 했던고, 뒤적여 본다. 간단한 메모와 길고 짧은 잡다한 글들. 급하게 받아적은 숫자들. 일 관련 스케치와 도면들. 잊지 않으려 요점만 써놓은 사온일기들. 작업 밑그림과 구상 의도들. 책을 읽다 적어 놓은 문장들. 그야말로 낙서들....... 그 중 다치기 전에 「미움 받을 용기」를 다 읽고 쓴 메모가 보인다. "이 책의 내용들이 내 생각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때로 놀랄만큼 비슷해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귀한 생각과 사유를 고작 삶을 변명하는 데 써먹으며 연명해 왔다. 한 번도 그것으로 춤 춘 적 없이."

02. 원이 말한다. "삶이란 게 B와 D 사이에서의 C라더니,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 없이 마주하게 되는 이 선택의 순간들....... 선택한 것들로 내 우주를 만들어 가는 거라지만 아! 씨발, 선택은 매번 졸라 어려워." 원의 욕설은 고단함의 절정을 이제 막 지났다는 신호이자 유머다. 그래서 그의 욕을 좋아한다.

01. 아침 기립기에 서니 비가 내리고 있다. 창에 붙어있는 빗방울들을 보다 쟈클린의 눈물을 듣는다. 빗물이 눈물이고 눈물이 빗물이다. 담당 치료사가 결근해 비는 시간, 금강경과 천문학을 읽는 동안 깊어진 오전으로 홍천의 비를 이끌고 온 엄마, 반찬를 정리하고 오만 자식 걱정을 하다 이내 멀리 멀리 비 속으로 간다. 비를 데리고 가시려나, 엄마 등에 맺히는 비를 한참 배웅하고 누워 엉덩이를 식히며 굴드의 바흐 토카타를 듣는다. 한 음 한 음 비처럼 떨어지며 파문을 일으키는, 굴드와 나만 있던 비밀스러운 오후도 지나간다. 치읓이 오고 비가 그치고 바퀴를 굴려 술집에 자리를 잡는다. 양꼬치를 굽고 씹으며 술을 마신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지 않고 앞날을 장담하지 않아 서로 말수가 적었었는데 후회가 늘어 말이 그만큼 많아진다. 돌아와 병실에 누워 눈을 감으니 그친 비가 내린다. 까마득한 벌판에 누운 몸 위로 다닥 다닥, 따갑다. 쟈클린의 눈물을 듣는다. 눈물이 빗물이고 빗물이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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