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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9. 11. 19:51
16. 아침 점심 저녁으로 삼십 분씩 휴게실에 설치되어 있는 기립기에 서고 코끼리를 탔다. 한국영화가 주를 이루는 무료 영화 사이트에 들어가 '계춘할망' '뷰티 인사이드' '부산행' '덕혜옹주'를 보았다. 작업치료사에게 '소년이 온다'를, 운동치료사에게 '채식주의자'를 빌려 한강의 소설 둘을 읽었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와 모짜르트 피아노 소나타 8번과 14번, 슈베르트 피아노 삼중주 1번을 들었다. 엘지트윈스가 공동 4위에 올랐다 단독 4위에 등극하고 4위를 수성하는 프로야구 세 경기를 보았다. 그렇게 지나가는 사흘 연휴의 끄트머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아직도, 바람처럼 들어오는 이런 생각에 픽- 웃는다. '이 시간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내일 아침 양평 옥천에서 눈을 떴으면 좋겠다.'

13. 이른 오후에 원이 전화했다. "오늘 바람 날 것 같어. 구름이 죽여줘서. 어찌하지? 이 구름, 이 바람....... 그건 그렇고, 아들이 어제 좀 웃기셔서 그 얘기해주려고."라며 말을 이었다. "온이 대뜸 이러는 거야. '엄마 엄마, 나한테 공부 열심히 해서 1등 해라 커서 돈도 많이 벌어라 태권도도 해라 노벨상도 받아라,라고 해봐봐.' 내가 '왜? 엄마가 그런 거 바란 적도 없는데.'라고 말했더니 '아니, 그냥 한 번 해봐봐'라며 재촉하더라고. 그래서 원하는 데로 말해줬지. '사랑하는 아들아, 1등 해라 돈도 왕창 벌어서 엄마 좀 주라 노벨상도 받고 유명해져라.' 그랬더니 실실 웃으며 온이 뭐랬는 줄 알아요? 이러더라고. '그런 거, 다 부질 없어.' 하 하. 이 '부질 없어'가 뭐냐하면 아들이 즐겨보는 삼시세끼 유해진 멘튼데, 들을 때마다 키득키득 웃으며 좋아하더니 이걸 한 번 써먹으려고 노리고 있었던 거지. 웃긴 쇄끼. 거기 구름도 좋나요? 오늘 구름이 참 멋지네. 이럴 땐 강을 건너며 보는 풍경이 그만인데. 말 나온 김에 한 번 건너갔다 올까나? 수고. 남편"

11. 오랜만에 연필을 깎는다. 피카츄와 함께 온, 검정 지우개가 달린 팔로미노 블랙윙 육공이. 정성들여 깎는다. 한 칼 한 칼, 숨을 낮추고 심지를 길게 나무도 길고 고르게 연필밥도 말끔하게. 잘 깎인 연필을 보고 있노라면 짜릿한 것이 설레곤 한다. 그리기에 대한 욕망 따위가 아니라 정갈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연필의 순전한 형태가 주는 흥분 때문이다. 날렵하고 매끈하게 잘 빠진, 단단하고 매몰차게 빛나도록 제련된 칼을 볼 때 느끼게 되는 쨍한 어떤, 미세한 살의가 섞인 울림 같은 것? 수색 작업실이었을 게다. 칼날 끝에 선 것 같은 나날들 중의 어느 날. 연필 스물네 자루를 깎으며 반나절을 보내고는 깎인 연필들을 바라보느라 나머지 반나절을 보낸 적도 있었다. 연필을 깎는다. 문득 심장을 깎는 상상을 한다. 심장은 어떻게 깎아야 짜릿한 형상을 갖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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