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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0. 2. 07:55
10. 아이가 읽을 책을 준다기에 미음보살 집에 갔단다. 오빈리 산 중턱에 근사하게 자리 잡고 있더란다. 복작한 읍내와 양수리로 흘러가는 남한강과 너머 산들이, 천지에 가득한 가을이 한 눈에 들어오더란다. 그 풍광이 내려다 보이는 테라스 탁자에 떡하니 앉아 아이가 이러더란다. 아줌마, 이 집 이사갈 때 되면 나한테 팔아요. 원이 웃으며 물었단다. 장미빌라에서 이사 안 가고 쭉 살겠다더니,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느냐고. 온이 능청스럽게 말하더란다. 여기 앉아서 삼각김밥 먹으면 좋겠구만. 이야기를 들으며 큭 큭 웃다가 생각하기를, 원의 말대로 이 녀석 천성이 한량인 거냐? 어허, 한량으로 살기 참 쉽지 않은 세상인디.

07. 바닷가 낮은집 마당. 페가수스 아래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 훌쩍 일어나 문가에 달린 투광등을 켠다. 딸깍, 별들이 꺼지고 마당 구석이 환해진다. 빨래줄 이불의 파란꽃들이 팟 팟 깨어나 근사한 배경이 된다. 남자는 그 빛 속으로 들어가 춤을 춘다. 발은 땅 위에 있으나 중력을 잃은 듯 물결처럼 구불구불 흘러다닌다. 몸이 고개처럼 굽이 굽이 섰다 평지로 흩어지고 봉긋 무덤도 만들었다 꺼트린다. 남자는 가늘고 길어서 나른하고 허청해서 걸음이 곧 춤이곤 했다. 외롭고 가난한 팔자라, 그 팔자와 살려고 춤을 추고 바다 곁에 있는다 했다. 둥실 떠올라 검은 하늘로 사라질 것처럼 몸을 놀리던 남자는 숨을 고르고 투광등을 끈다. 꽃이 지고 딸깍, 별들이 켜진다. 남자는 마루에 걸터 앉아, 아구 되다, 술을 마신다. 잠시 조금 덜 외로운 것 같다.

04. 공항에서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린 장콜을 타고 퇴근길을 뚫고 병원에 도착하니 아홉 시가 다 되었다. 나를 병실에 넣어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이 전화를 했다. "팔당을 지나고 있고, 아들은 떡이 되어 늘어져 있네요. 온이한테 아빠가 얼른 집에 왔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당근 좋겠다네. 아빠가 집에 와서 너랑 밖에 나가 다닐 때 다른 사람들 하곤 다르게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고. 아주 조금 이상할 것 같기는 하다면서. 그 이상한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고 또 질문했지. 친구들이 니네 아빠 휠체어 탄다면서? 하면 뭐라 할 거야? 그랬더니 잠시 생각하던 온이 뭐랬냐면, 그래,라고 하지. 하더라고. 그거 한 마디로 끝이냐고 했더니 이러더라고. 간단한 게 최고야. 멋지지 않아? 우리 아들. 피곤할 텐데 어여 자요. 여행, 좋았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아. 바이." '그래'라고 말하는 아들, 기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다.

03. 달그락 달그락 굴러 와 방파제 끝에서 바람을 맞는다. 아이는 모래밭에서 바다와 만났다 헤어지며 까륵 까륵 놀고 있다. 이제 모래 위를 거닐 수 없다. 자갈 위를 갈 수도 없다. 단단하고 평평하지 않으면 길 위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슬프지는 않다. 사실일 뿐이다. 방파제를 넘은 바람처럼 선선하게 다가온 그가 내 머리카락을 뒤져 비듬을 캐내 바람에 날린다. 붙어 서서 머리 속을 말끔히 청소해준다. 이렇게도 다정한 바다라니. 아이를 부른다. 아이는 왜, 한마디 날리고는 바다의 시작과 끝을 좇느라 여전히 바쁘다. 뭉실 뭉실 피어 있는 구름. 새처럼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사람들. 내 어깨를 짚고 바다를 보는 그와 뛰노는 아이. 바퀴에 의지해 더더욱 관망자가 되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바람이라니.

02. 원이 문자를 보냈다. '7시 47분 전철 타고 갈 거예요. 병원에 9시 조금 넘어 도착'. 양평군 장애인 복지센터에서 공모한 장애인 가족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원이 사연을 적어 응모했고 당선이 되었다. 여행지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어 제주를 택했고 오늘 떠난다. 그 섬에서 이틀 밤을 묵을 것이다. 간단히 짐을 싼다. 기저귀도 하나 챙기다 킥킥 웃는다. 이 나이에 기저귀라니. 세상 첫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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