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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6. 11. 23. 18:47
29. 점심 선택식으로 영양죽이 나왔다. 별미랄 것까지는 없지만 나쁘지 않아 그럭 저럭 먹고 있는데, 병실 최고참 보호자가 지나가며 말한다. "젊은 사람이 왜 죽을 선택했어? 뭔 맛이 있다고. 난 팥죽 말고는 죽은 절대 안 먹어. 그걸 왜 먹어." 쏘 왓?! 도대체, 말인지 막걸린지.

26. 전철을 타고 옥천으로 가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오고 가던 이 길, 지금은 특별하다. 더욱 특별하게 첫 눈이 내린다. 상봉에도 구리에도 덕소에도 양수에도 팔당에도 운길산에도 국수에도 내린다. 눈 내리는 아신에 내려 만난 아이가 말한다. 아빠도 오고 첫눈도 오고 오늘 아주 특별한 날이네. 모닝을 타고 스쳐 지나가는 논과 밭, 길가와 언덕과 산의 초목에 핀 눈꽃이 아름답다. 차라리 포근하여 서설이라 할 만하다.

아이와 붙어 앉아 각종 보드게임을 하다보니 어느새 밤이다. 그동안 원은 밥과 반찬을 짓고 만들어 차리고 먹이고 거두었고,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이삿짐들을 쉼 없이 옮기며 정리하고 있다. 아이가 일을 보느라 짬이 난 시간에 원에게 말한다. 힘들어 어째야쓰까이. 쉬엄 쉬엄 하소. 몸 쓰는 일 하나도 도와주지 못해 아조 미안해 몸둘 바를 모르겄네. 원이 에고, 책들을 내려놓고 허리를 짚으며 말한다. 할 수 없는 걸 할 수 없다고 미안해 하거나 자책하지 마셔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아들이랑 놀아주고 당신 구상하고 있는 일들 하고 가끔 내 노고도 위로해주시고. 그러면 돼요. 그거면 충분해. 물리적으로 힘든 거? 마음이 편안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자, 아들 똥 싸고 나오면 둘이 오늘의 마지막을 불태우셔. 난 책장 정리에 매진할라니까.

25. 온이 말했다. "아빠, 나 동생 생겼어요. 햄버거집에서 받은 곰인형인데 이름을 곰. 도. 리.라 지었어. 곰돌이가 아니고 곰도리야. 곰도리! 알아 들었지? 곰의 도리를 지키는 곰이야. 도리를 아는 곰이지. 이름 잘 지었지? 엄마 앉은키만 해." 도대체 '곰의 도리'가 무엇인지 궁금해 물어보려다 말았다. 설마 아이가 곰의 도리를 생각해보았겠는가. 나름의 언어유희일 터. 어쨌거나 도리, 삼천 년만에 들어보는 단어인 것 같다. 도리,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

24. 허름한 동시상영관. 홀로 앉아 영화를 본다. 동태들 사이에 꽁꽁 얼어 누워 있고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절단기를 향해 가고 펭귄따라 파도치는 바다에 뛰어들고 지렁이에 몸이 감기고 심해로 지루하게 가라앚고 목에 걸린 화려한 화환이 목을 조여 숨이 막히고 뜨거운 도로를 걷는 맨발이 피에 붉고 톱이 슬근 슬근 등을 썰고 비누방울에 실려 떠다니다 퍽 터져 추락하고 거미줄에 걸린 채 타란튤라에게 다리가 씹히고 건초가 굴러다니는 황무지에 거꾸로 꽂혀 있고 박장대소하다 허리가 부러지고 링 위에서 하염없이 얻어터지고 칼 끝에서 춤을 추고 여우가 심장을 파 먹고. 연관 없는 씬들이 빠르게 명멸하는 가운데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내가 주어고 그 주어는 끝내 죽지는 않는다는 것.

22. 검은 밤 검은 말 한 마리 길 끝에서 긴 숨을 뱉는다. 말의 입을 떠난 숨은 갈기 뒤로 흘러가 몽글 몽글 부풀며 커지더니 말보다 큰 구름이 된다. 구름은 색과 자세를 갖춘 후 꿈틀대며 말에게 신호를 보낸다. 말을 태우고 저편으로 갈 심산인가. 그러나 말은 끊어진 길 너머를 바라볼 뿐이다. 구름은 비를 내리고 번개도 치며 유혹하지만, 저편을 애써 외면하는 것인가, 말은 구름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말이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길 없는 들로 한 발 떼려하자 구름은 급격히 부피와 밀도를 붕괴시켜 말의 입 속으로 빠르게 숨는다. 말은 순간 탁 막힌 숨을 이힝히잉 한 번 울어 삼킨 후 들로 다리를 내밀어 나아가고 이내 어둠이 된다. 저편의 구름을 흉중에 담고 가는 이 까마득한 어둠은 과연 이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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