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1

노트 2017. 1. 3. 12:53
08. 꿈을 꾸었다. 깨어나니 다 잊혀졌는데 한 가닥 여운이 남아 있었던 걸까, 이런 생각이 머리 속을 돌아다닌다. '내 큰 단점 중 하나는 진지하게 절망하지 않는다는 거다. 내겐 절망도 쇼란 말인가.'

07. 젊고 스타일리쉬한 삼신 할머니가 자신의 손으로 생을 점지해주었던 한 교사에게 다가가 말한다. "아가, 더 나은 스승일 순 없었니? 더 빛나는 스승일 없었어?" 그 말을 듣는 드라마 속의 교사도, 토요일 오후 침대에 모로 누워 엉덩이를 식히며 도깨비를 다시보기로 보고 있던 나도 운다. 더 나은, 더 빛나는 삶일 순 없었던가.

04. 그가 온탕에 발을 담그고 수증기처럼 웃다 가는 발목을 들어 물장구를 친다. 물거품이 방울 방울 종아리를 감싸자 희안한 일이 일어난다. 그의 주름들이 펴지고 가슴이 납작해지고 거뭇한 털들이 사라진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워지고 무릎이 분홍빛으로 투명해진다. 오십 년 동안의 갖은 상처가 사라져 말끔해진 몸이, 작아진다. 그 안의 폐와 기억도 심장과 의식도 함께 작아져 모두 다섯 살 만큼 가벼워진다. 이 놀라운 변화를 알지 못하는 걸까. 그는 천진하게 일어나 짧아진 사지를 쭉 뻗어 기지개를 켠 뒤 물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친다. 어찌나 빨리 도는지 탕의 물들이 그를 따라 소용돌이 친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소용돌이의 눈에서 팡 - 어린 돌고래가 튀어오르더니 피부의 반짝이는 순간만을 남기고 다시 중심으로 사라진다. 탕은 이내 잦아들고 고요해진다. 그도 돌고래도 보이지 않는다. 저 좁은 구멍을 통해 굽이 굽이 바다로 갔는가? 인연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시 생을 시작하려고? 기억을 다섯부터 새롭게 조직해려고? 돌아올까, 온다면 어떤 구멍으로 몇 살이 되어 올까? 목욕탕 물이 빠지고 문이 닫힌다. 깜빡이던 네온사인도 꺼진다. 새해 첫 날의 세상도 그렇게 툭 꺼진다.

02. 그가 말했다. 내 눈빛이 형형하여 '깊은 강을 건너 와, 깊은 강의 비밀을 알아버린 자의 눈빛 같았다'고. 생각해보니, 비록 배꼽 이하의 신경들을 잃었으나 사선을 건너 와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내 삶에서 가장 깊은 강을 건넜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깊은 강의 비밀이라니. 삶은 순간의 향연이므로 순간 순간의 나는 장애와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온전한 존재라는 거? 강을 건너 왔으니 강도 강을 건너게 해준 것도 잊고 버리라는 거? 세상의 모든 것들은 순간 순간 변화하므로 나라고 규정할 나라는 실체가 없으니 울고불고 슬퍼할 나도 없다는 거? 다치는 순간 새롭게 살아가야 하는 또다른 우주로 이동했다는 거? 장애로 인해 삶이 훨씬 단출해지고 명확해졌는데, 그 단출함과 명확함을 내가 욕망해 왔다는 거? 내 장애에 목적과 이유가 있을 거라는 거? 세상은 홀로그램이며 태어나고 죽는 것이 없다는 거? 아니다. 이런 추상적이고 어디서 주워 들은 공공연한 비밀은 아닐 것이다. 보다 가볍고 간략한, 내 피부와 맞닿는 사사롭고 직접적인 어떤 것일 게다.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일까?
그는 내가 가벼워 보인다고도 했다. 달개비를 보며 나비를 연상한 후 뿌리와 날개 중 어떤 것을 취할까 갈등하던 예전의 나를 기억해 내곤, 그때는 내가 뿌리 쪽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날개와 가까운 것 같다고 했다. 생각하기를, 그의 말대로 몸도 마음도 분명 가벼워졌다. 체중이 훅 줄어 몸이 가벼워졌고, 수행하지는 않으면서 관념으로만 무거웠던 책임과 관계들을 장애를 핑계로 제법 덜어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내가 날개와 친해진 건 이 이유이 아니라, 때로 튼튼한 뿌리를 원하기도 했으나 기질적으로나 태생적으로나 이미 날개의 족속이었던 까닭도 있으리라. 그리고 필시 사라지고 마는 만물, 그중에서도 생물의 근본적인 속성은 뿌리보다 날개와 가깝지 않은가? 가볍고 가벼워져 끝내는 숨처럼 훅 날아가야만 하는 존재. 그렇게 떠나는 것들에게는 날개가 적당하고 또 근사하지 않은가? 이 가벼워짐도 깊은 강의 비밀 중 하나려나?
그는 덧붙였다. 자신 또한 더 가벼워지고 싶다고. 뿌리의 부재를 아쉬워하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뿌리로 인한 무게보다는 날개로 인한 가벼움을 욕망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고. 그가 무엇을 덜어내 가벼워질지, 가벼워져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 없으나 응원한다. 그의 가벼움을. 그는 어떤 디자인의 날개를 장착하게 될까? 날개 없이도 구름처럼 떠다닐만큼 가벼워질까?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013  (0) 2017.01.23
17012  (4) 2017.01.11
17011  (2) 2017.01.03
16123  (0) 2016.12.23
16122  (2) 2016.12.11
16121  (0) 2016.12.02
Trackbacks 0 : Comments 2
  1. 2017.01.04 11:36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yaalll 2017.01.04 19:08 신고 Modify/Delete Reply

    병원 매점에는 애석하게도 오레오 씬즈가 없네요. 대신 웨하스를 사가지고 올라와 먹고 있어요.^^ 덜 가벼운 알콜에 덜 가벼운 얘기, 환영입지요.^^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