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12

노트 2017. 1. 11. 13:17
19. 꿈 : 번듯한 사무실로 들어간다. 실내장식이 상투적으로 럭셔리하다. 반짝 반짝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 기획사 대표가 마지못해 맞이하고는 나를 떠넘기듯 디자이너에게 소개시켜준다. 긴 생머리에 제복을 입은 디자이너도 성의 없이 인사하고 책상 위에 퉁명스럽게 앨범 쟈켓을 올려놓는다. 윗선의 청탁으로 어쩔 수 없이 일을 진행하는 실무자들의 자괴감과 짜증이 묻어 있는 태도다. 그러나 나는 그 윗선을 알지 못해 소심해진다. 앨범 쟈켓을 보니 내 이름이 주홍색 알파벳으로 가늘고 날렵하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디자인이 애매모호하게 단순해서 알게 모르게 복잡하다. 뒷면을 보니 수록곡 리스트와 함께 내 프로필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데, 헐 - 허망하고 잡스럽게 생겨 보기 민망하다. 디자이너는 쟈켓 디자인을 이대로 종결지어도 되겠느냐며 귀찮은듯 묻는다. 다른 건 모르겠고 내 사진만은 꼭 바꾸고 싶다고, 쓸만한 사진을 찾아올 것이니 기다려달라 하고 집으로 와 서랍을 뒤진다. 사진 몇 묶음을 찾아내 풀어 한 장 한 장 살펴본다. 방랑의 기억들 속에 정작 나는 없다. 풍경과 사물이 있을 뿐이다. 뒷모습만이라도, 멀리 한 점일지라도 '나'를 만나보려했으나 단 한 컷도 없다. 디자이너와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 조급해하며 슬라이드 필름도 들여다본다. 옛 그림들 뿐이다. 지읒 선배가 돌연 나타나 뭐 하고 있느냐 묻는다. 나를 찾고 있다고 하니 선배가 말한다. 너? 저기 운동장에 있잖아. 바삐 걸어가더구만. 창문으로 가 운동장을 내려다 보니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사진기를 찾아 얼른 찍고 인화를 맡겼는데 인화된 사진에 나는 없고 텅 빈, 아니 나 이외의 것들로 가득 찬 운동장 뿐이다. 어찌할꼬, 난감해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래가 들려온다. 가까이 가보니 엘이디 광고판 속에서 허망하고 잡스럽게 생긴 내가, 나 아닌 내가 노래하고 있다. 꼭두각시처럼 관절마다 줄에 매달린 채 춤을 추고 있다.

18. 오늘은 월령리 이응의 침대에서 잠이 깬다. 전기스토브에 전기장판에 두툼한 이불도 덮었건만 춥다. 허술한 바닷가 집의 윗풍이 어련하겠는가. 새우처럼 구부리고 자던 이응이 뒤척이다 돌아눕는다. 마른 어깨에 내 몫의 이불까지 덮어주고 일어선다. 소반에 놓여있는 빈 술잔과 먹다 만 건어물이 간밤의 사랑처럼 쓸쓸하다.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아침은 이미 농익어 해는 따뜻하고 하늘은 맑고 푸르다. 차가운 바람이 적당해 휘청거리지 않고 걸을 수 있어 다행이다. 바다가 보이는 길로 접어드니 없었던 올레 14코스 표지와 간세 조형물이 보인다. 이 길도 올레에 갇혔구나. 섬의 길들이 올레에 의해 공개적으로 규정돼 더이상 비밀스러울 수 없게 되었구나. 안타깝지 않은가. 숨길 수 없는 연정이라니. 의연한 자생 선인장들이 무리지어 살고 있는 길을 걸으며 바다를 본다. 넓고 푸르고 바람처럼 파도도 적당하다. 직진하면 어디에 닿으려나? 그곳이 어디든 분명 문명인들의 땅일 터. 그렇다면 수평선 너머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미지를 향해 바다 위를 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지금 그 바다 위에 있다는 사실만이 의미있는 것은 아닐까? 방향을 가늠키 어려운 광활한 바다에서 내가 직선으로 가고 있다는 건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느새 수협 창고를 지나 작은 포구에 다다른다. 상상 속에서도 생각에 빠져있었구나. 그저 걷자. 지금은 그래야 한다. 상념 없이, 두 다리를 움직여 발을 내딛는 유기적인 몸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걸어 이만 돌아가자. 맨몸인 이응에게. 그 조금 따뜻한 추위에게.

16. 아침 기립기에 서서 전화하니 원이 받았다. 아이는 잠들어 있다 했다. 일어날 때가 되었으니 재주껏 깨워보라며 원이 핸드폰을 스피커모드로 바꿔 아이 옆에 두었다. 다른 높낮이와 길이로 수없이 이름을 불러 깨우곤 아직 잠결인 아이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생일 축하합니다. 아이가 말했다. "아빠 노래 들으니까 또 졸려." 어느새, 아홉이라니. 뭔 말을 더 하랴. 탈 없이 자라주어 고맙고 고마울 뿐.

12. 저녁을 먹고 깔끔하게 이를 닦은휴게실로 가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코끼리에 옮겨 앉는다. 다리를 묶고 코끼리를 타기 시작하며 무심코 벽면에 걸려 있는 티브이로 눈을 돌리니 젠장, 반씨가 귀국 기자회견 중이다. 조국이니 국민이니, 애국이니 희생이니, 화합이니 화해니 치유니 구태의연하고 영혼 없는 미사여구들을 남발하고 있다. 마치 자기가 세계 일 좀 하느라 떠나 있었더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다는 듯 거들먹거리며, 조국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단다. 금방 씹어 넘긴 참치김치덮밥이 배 속에서 시끄럽기 시작한다. 제발 아무 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 잘난 완장으로 혹세무민하지 말기를 바랐는데 심히 우려스럽게도 기어이 제 욕심을 채우고야 말겠단다. 속이 울렁거린다. 더 듣기 고역인 건 그를 둘러싼,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아우성이다. 아, 씨발! 홧김에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음악으로 귀를 막고 강렬하고 매력적인 비트에 맞춰 사소하게 남모르게 헤드뱅잉을 하며 잊으려는데 생각이 이어진다. 세계적 별명이 된 기름장어의 습성이 어디 가겠는가. 최악의 총장이었다는 평이 아니 땐 굴뚝의 연기겠는가. 겨우 제 몸보신이나 할 줄 아는 자가 때는 요때다하며 감히 어부지리를 꿈꾸다니. 박씨와 최씨의 파렴치한 범죄행각에도 이렇게 흥분하진 않았었는데, 반씨의 행보에 신경이 곤두서고 맥박이 빨라지는 건, 박씨야 과거와 현재를 심판하는 일이지만 반씨는 이 나라 인민들이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를 끔찍한 미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1. 여섯 시 알람소리에 깨어난다. 기지개 한 번 켜고 일어나 매트침대에 걸터 앉아 정신을 가다듬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조심스레 거실로 걸어 나가 화장실 전등을 켜고 문을 연다. 제법 높은 턱을 으쌰 올라가 슬리퍼를 신는다. 물기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긴장하며 변기에 다가선다. 보조바를 잡고 앉아 오줌을 누고 일어나 물을 내리고 손을 씻고 거울에 비친 익숙한, 때로는 낯선 얼굴 한 번 훑어본다. 천천히 턱을 내려와 화장실 불을 끄고 부엌으로 간다. 부엌등을 켜고 세 식구 하루 양식이 될 쌀 네 컵을 볼에 덜어 박박 씻어 전기밥솥에 옮긴다. 물을 맞춘 후 뚜껑을 닫고 취사 버튼을 눌러 밥을 앉힌다. 어제 해놓은 카레가 있으니 찌개나 국은 패스. 수건에 손을 닦고 매트로 돌아와 앉아 외출복으로 두툼하게 갈아 입고 사진기를 챙겨 둘러맨다. 아직 잠들어 있는 원과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다 신을 신고 소리없이 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계단 두 개를 더듬 더듬 내려와 공동 현관문을 연다. 한기가 몸과 정신을 깨운다. 겨울은 이래서 좋다. 찬찬히, 턱과 돌에 걸리지 않고 구멍에  빠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신중하게 걷는다. 세상은 아직 어둑하다. 안개가 낮고 적당하다. 며칠 논길을 걸었으니 오늘은 마을을 걷기로 한다. 호기를 부려 어둠과 안개를 툭툭 차기도 하며 한 발 한 발 몸을 간수하며 정성스럽게 걷는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차츰 걷는 게 수월해져 언젠가는 눈길도 걸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서.
새해부터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앉아 소변을 뽑은 후 눈을 감고 기도하듯. 매양 똑같지는 않다. 현미밥을 지을 때도 있고 유부초밥을 만들기도 한다. 원이 먼저 일어나 화장실을 점령해 시간을 지체하기도 하고, 똥을 쌀 때도 있다. 양말을 매일 갈아 신고 몸 컨디션도 늘 같지는 않다. 집을 나서면 길이 여러 갈래니 그날 그날 선택해 걷는다. 아침도 매일 조금씩 길어진다. 이런 상상을 시작하게 된 연유는 원이 천일기도 중이니 그때 까지만이라도 그의 기도에 맞장구를 쳐야겠다 새삼 다짐한 때문이다. 걷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어 걸을 생각이 없고, 그래서 걸으려 하지 않으니 걸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일이면 한 칠백 일쯤 남았으려나. 훗날의 낙담을 걱정하진 않는다. 희망과 낙관 따위 그때 내려놓으면 된다. 희망을 쥐고 있는 게 어렵지 절망은 차라리 편안할 것이다. 욕심이 힘들지 포기는 오히려 나를 가볍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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