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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7. 2. 1. 14:57
07. 오십 일 년 전, 춥고 좁은 방에서 엄마의 자궁을 빠져나와 울었던 날이다. 몰래 혼술로 기념하고 있다. 안주는 에릭 사티다. 소주 한 모금 짜릿하게 넘기고 상상한다. 세상에 갓 나온 핏덩이인 나를 보는, 기억할 수 없는 할머니와 서른의 엄마를. 그들의 땀과 웃음과 기쁨을. 지금 그들에게 나는 한없는 기쁨이고 경이로운 생명이며 귀하디 귀한 존재다. 그리고 그들의 땀과 웃음과 기쁨과 사랑이 내게 들어와 생의 근원적인 에너지로 새겨진다. 그렇게 나는 작디작고 벌거벗은 온 몸으로 축복을 받고 있다. 그 순간을, 내가 태어나던 그 따뜻한 순간만을, 회한을 밀쳐내며 만끽하고 있다. 오늘은 그래도 된다고 위로하면서. 술이 달다. 사티도 쓸쓸하지 않다.

06.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것. 그러니까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우주의 씨앗이며 내가 만들어가는 우주의 동력이며 결국 우주 그 자체다. 내게 그 외의 우주는, 나를 지배하는 객관적인 우주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도 하지만, 정말 그런가? 의심하기도 한다.

03. 아침 기립기에 서서 스탄 게츠의 「Voyage」를 듣고 있는데, 그가 찬찬히 휠체어를 몰며 내 옆을 지나간다. 그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노란 비닐봉지가 묵직해 보인다. 운동치료 매트 앞에 멈춘 그는 매트 위에 신문지를 깔고 노란 비닐봉지를 올려 놓는다. 자세가 좀 불편했는지 휠체어를 움직여 다시 자리를 잡고 브레이크를 건다. 그래도 매트와 몸 사이가 넓을 수 밖에 없어 허리를 잔뜩 굽힌다. 그렇게 불편한 몸이 만들어내는 간격을 몸으로 메꾸고 봉지를 풀어 하얗고 네모난 물건을 꺼내는데, 도자기 화분이다. 그는 화분에 알멩이흙을 부어 넣고 그 위에 한 줌 한 줌 손으로 부슬부슬한 부엽토를 퍼 넣는다. 동작을 만들기 위해 애써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질끈 묶은 그의 곱슬한 뒷머리카락 끝이 등에 그려져 있는 미키마우스를 간지럽힌다. '무언가'를 심으려 힘겹게 움직이는 그의 몸과 구부정할 수 밖에 없는 그 태도를 경건하게 바라본다. 검은 뿌리에 잎이 반들한 초록 식물을 봉지에서 꺼내 화분에 심는다. 흙을 채워 다독이며 마무리 짓고 허리를 숨을 몰아 쉬자, 마침 운동시간에 맞춰 온 담당 치료사가 완성된 화분을 치료실 조그만 창가에 올려 놓는다. 치료사가 식물의 이름을 묻자 그는 까먹었다며 활짝 웃는다. 그 나이에 걸맞는 그의 주름도 활짝 피어 아름답다.

01. 하루 동안 행한 일들을 핸드폰 캘린더 일정란에 매일 매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공식 재활 치료와 개인 운동, 소변과 대변의 양과 상태, 영화•드라마•강의•다큐 등 시청한 동영상, 읽은 책, 섭취한 건강보조식품과 아주 드물지만 고맙게도 먼 길을 찾아온 방문객 등이다. 유튜브에서 찾아 듣는 음악도 그중 하나인데 처음 기록은 간략했다. 베토벤을 예로 들자면, 달랑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그렇게 간소하던 기록이 야금 야금 늘어나기 시작했다. 조와 작품번호 쯤 덧붙이면 왠지 폼 좀 나겠다 싶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Op 37」이 되었고, 연주자가 궁금해져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Op 37. 알프레드 브렌델」이 되었으며, 지휘자도 무시할 바 아니지 하여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Op 37. 알프레드 브렌델.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되었다. 여기서 그만두려했는데 익명의 관현악 연주자들이 걸려 차마 내치지 못하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C단조 Op 37. 알프레드 브렌델. 클라우디오 아바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로 기록이 늘어났다. 연주 장소와 연도는 고민 끝에 너무 나간다 싶어 접었다. 이렇게 기록이 길어지는 동안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늘어나는 기록의 마디 마디마다 '부질없음'과 맞딱트려야 했는데, '음악을 듣는 그 순간, 음악과 나와의 접촉과 교감 그리고 그때 내 마음에 일어나는 파문을 보고 느끼면 그만이지 기록이 무슨 필요란 말인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이런 '부질없음'과 맞서 기록을 이어 나가게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질없음' 이었다. '부질없음에 집착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일. 부질없다 하면 부질없지 않을 일이 어디 있으랴. 기록도 순간이니 순간을 해하지 않는다면 그저 즐기면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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