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2

노트 2017. 2. 11. 14:41
20. 봄이 오긴 올 모양인갑다. 부쩍 숲이 그리운 걸 보니. 빛과 연두와 검정과 그늘과 바람과 소리와 냄새들. 어우러져 가득 찼으면서도 텅 빈.

19. 병실에 새로운 환자가 왔다. 걸어다니는 청년이다. 인사는 커녕 눈도 안 마주치고 제 할 일만 한다. 며칠 지켜보던 고참 어른이 젊은 친구가 인사도 할 줄 모른다며 쯧쯧 혀를 차더니, 급기야 버르장머리가 없다며 험담을 한다. 그까짓것 인사 좀 안 하면 어떤가. 인사하지 않는 것보다, 아니 인사 유무와 상관없이 훨씬 더 우려할만한 일은 인사 안 한다는 이유로 전혀 모르는 타인을 비난하는 거다. 그렇게 버릇 없다 단정하는 거고 그런 소문을 만드는 거다. 내가 간혹 그래왔듯이.

17. 오후 한 시 삼십일 분 나는 기립기에 서 있다. 아니, 오후 한 시 삼십일 분 기립기에 '서 있음'에 내가 있다. 내가 기립기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립기에 서 있는 내가 있는 것이다. 가합-임의로 합하여 있는 순간이 '나'이고, 그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변함없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고유의 '나'란 없다. 그러하니 '나'가 주어일 수 있는가? '나'는 동사와 연기하여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 아닌가?

16. 그가 간다. 다시는 지지 않을 석양처럼 돌아올 수 없는 뒤안길처럼 바람을 이끌고 간다. 흩어지며 간다. 욕망과 불행과 허무였던 나를, 그 비밀의 시절을 완전히 건너가고 있다. 그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행여 온다 해도 그는 이제 그가 아니그는 오지 않을 것이다. 잘 가기를. 안녕 비둘기, 안녕.

14. 보르헤스가 말했다. "나는 마치 율리시스처럼 '아무도 아닌 자'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즉 나는 죽을 것이다."라고. 그의 말대로 '나'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므로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비어 있어야 하므로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간 '나'가 죽어야 한다. 윤회라는 수많은 생에서 일어나는 일일뿐만 아니라, 매일 '나'에게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11. 오랜만에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가고 있다. 스쳐가는 늦겨울의 초목들이 찬란하다. 김광석, 그의 목소리는 내게 늘 동시대였고 동년배의 것이었다. 언제나 '지금, 여기'의 울림이었다. 오십이 되도록 그랬다. 그런데 오늘, 야릇하게도 그의 목소리가 젊다. 감성과 떨림이 여리고 풋풋하다. 찬란하지만 과거로부터 들려오는 지난날의 공명 같다. 묘한 것이, 이제 진정 돌이킬 수 없게 나이 든 것인가. 아니면 이제서야 그 시절을, 그 깊은 강을 건너 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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