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23

노트 2017. 2. 21. 15:33
23. 낯선 방이다. 남아 있는 인기척이 수다스러운 걸로 보아 밤새 여럿과 뒹군 모양인데, 모두 어디로 가고 홀로 멍하니 깨어나 앉아 있다. 정신을 수습하고 이불을 개키고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밖은 눈의 세상이다. 겨울왕국이다. 건너 숲에서 홍당무코 올라프가 걸어나온다해도 이상할 것 없겠다. 여기가 어디인고, 온통 하얀 천지간을 둘러본다. 아, 여기. 산음리 산 속 집이로구나. 내 속에 무엇이 들어앉아 있나 궁금해 왔었지. 난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숨겨둔 트라우마를 내놓으라 다그쳐 곤혹스러운 밤이었지. 바삭바삭 눈을 밟으며 걷는다. 나무 나무에 핀 눈꽃 눈꽃이 밤새 바람이 어떻게 불었는지 알려준다. 아버지의 그늘? 왜소한 신체에서 비롯된 열등감? 그들이 드러내라고 종용하는 내 맺힌 상처의 기억들이 그것일까? 그 기억들은 과연 믿을만한가? 방어와 공격을 위해 스스로 조작하고 기획한 것은 아닐까? 이 눈길에 이런 생각, 실례다 싶어 접고 음악을 듣기로 한다. 두 다리가 이렇게 생생하니 몸과 가까운 재즈가 좋겠다. 듀크 조단의 「Flight to Denmark」를 찾아 듣는다. 앨범 쟈켓에 새겨져 있는 하얀 설경과 그 속의 검은 남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익숙한 멜로디와 리듬이 관성을 자극한다. 걷고자 하는 다리의 관성. 피아노 따라 드럼 따라 베이스 따라 걷는다. 스탠다드한 곡들이라 스탠다드하게. 듀크, 당신은 날아서 덴마크로 간다지만 나는 걸어서 옥천으로 가겠다.
툭! 누군가 어깨를 친다. 듀크인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훤칠한 수박이다. 담배 사러 가는 길이라며 담배 한 대를 권한다. 길 가운데 꽂힌 막대기처럼 서서 연기를 뿜으며, 여태껏 무언가를 다 태워 연기로 날려보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는데 수박이 말한다. 우리 키스할까? 이 눈길에 이 눈꽃 아래에서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싶어 입을 맞춘다. 수박은 맛있다 했고 나는 수박맛은 아니네라고 생각했다. 수박은 어제 공개적으로 말했다. 자신은 몸의 느낌을 귀하게 여긴다고. 섹스도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제 몸을, 몸이 느끼는 절정을 사랑해서 하는 거라고. 물이 많아 닉네임도 수박이라고. 그러다 가슴의 응어리를 꺼내며 한참을 통곡했는데 응어리의 정체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그의 덜덜 떠는 몸을 보며 저 여자는 통곡도 몸으로 하는구나 생각했다.
갈림길에서 수박은 직진하여 구멍가게쪽으로 가고 나는 오르막길로 접어들어 해를 등지고 걷는다. 숲에서 눈꽃이 뭉텅이로 뚝뚝 떨어져 짐승인가 몇 번 놀란다. 길이 이내 끊어진다. 잠시 길 없는 공터를 바라보다 돌아서 해를 받으며 내려간다. 무거워 쳐진 가지들 아래를 지나가는데 그때, 갑자기 바람이 휙- 세차게 불어 가지에 피어 있는 눈꽃들을 날린다. 눈꽃들은 먼지처럼 산산이 허공에 흩어지고, 햇빛이 눈 입자 하나 하나를 비추어 하나 하나 반짝인다. 빛들의 향연. 수천의 해가 떴다 지는 장관이다. 아! 이건, 말로 할 수 없어 신비다. 혹 영원과 초월, 피안과 지고와 구원이란 게 있다면 지금 여기에, 너머 저편이 아니라 이 세상에, 떴다 지고 흩어지고  변화하는 지금 이 순간들에 있다고 가르쳐주는 것 같다. 산 속 집으로 돌아간다. 이왕 왔으니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알다가도 모를 상처를 꺼내 볼까? 부둥켜 안아 볼까? 가능할까? 늘 도망다니던 관성이 과연 나를 직면케 할까? 어쩌다 마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맞닥뜨리더라도 수박처럼 통곡하지는 못할 것이다. 나를 죽도록 미워한 적 없고 못 견디게 사랑한 적도 없으므로. 통곡한다면 그 울음은 관념에서 짜낸 가짜일 것이다. 듀크의 피아노가 좀 우울해진다. 스탠다드하게. 관성적으로. 아! 이 익숙함. 지랄맞다.

21. 눈을 뜨니 원소리의 늦은 아침이다. 몸이 새겨진 소파에서 뽀드득 일어나 창밖을 보니 밤새 눈이 내렸는지 포근한 설경이다. 외투를 입고 아버지의 장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다. 이 장화는 이상하다. 발을 넣으면 우주복을 입은 듯 온 몸이, 나아가 정신까지도 든든해지고 거칠 것 없어지는 느낌이다. 비탈길을 내려가 왼쪽 산을 오르는 길로 접어든다. 없었던 집들이 들어서 있고 집집마다 육중한 대문이 자리잡아 산으로 오르는 길이 모두 끊어졌다. 그렇다고 못 가겠는가. 지금 나는 영혼이기도 하니 초능력자처럼 캐스퍼처럼 슬며시 문을 통과하고 발자국 없이 정원을 가로지르고 철책을 빠져나와 장애를 건넌다. 산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미나리아재비와 노루오줌이 피어 있다. 미나리아재비, 너는 철마다 본, 지난해 본, 어제 본 그 미나리아재비가 아닌데 난 똑같은 미나리아재비라고, 철마다 본, 지난해 본, 어제 본 미나리아재비라며 똑같이 부른다. 미안하지만 인간의 한계이니 이해해주시길. 너를 그렇게 동일화하여 차이를 없애지 않으면 우린 혼란하여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산을 오른다. 메눈인지라 밟을 때마다 눈이 부서지는 느낌이다. 둥글레와 오이풀이 피어 있는 낮은 고개 하나 넘어 양지로 내려가니 무덤 몇 기가 가지런히 봉긋하니 햇볕을 쬐고 있다. 당신들은 어떻게 죽었을까. 생이 좀 살만했을까. 죽음 너머 어디로 갔을까. 무덤 위에 그 주변에 할미꽃과 꿩의밥, 솜방망이와 각시꽃 등이 가득하다. 무덤이 피워낸 꽃들이 철 없이 눈을 헤치고 나와 서 있다. 지상이 그리워 이승이 그리워 당신들을 이루던 일부를 보내 꽃을 피웠을까. 꽃이 지면 그것들은 또 어디로 가 깃들까. 무덤 옆에 꽃들을 피해 벌렁 누워 눈부신 햇살을 받는다. 며칠 이러고 있으면 내 다리에서 다리에 어울릴 법한 풀꽃들이 피어오를 것 같다. 무엇이든 필 때면 다리가 간지럽겠지. 따끔거리기도 하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렴! 지금은, 지금도, 좋다. 아! 좋다. 이 쌀쌀하고도 따사로운, 눈과 꽃들과 무덤들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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