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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7. 3. 1. 09:36
10. 대통령이 파면 되었다. 기쁘다. 고생들하셨다. 페북의 차고 넘치는 탄핵 인용 축하 메세지들을 보다 이럴 때일 수록 조용해야겠다 싶어 페북을 덮고 평화롭게 빌 에반스의 「Moon Beams」를 들었다. 그래도 뭔가 아쉬워 어찌할까 하는데 치읓이 '축하주 한 잔?' 문자를 보냈다. 오키도키. 기특하고 고마운 친구같으니라고. 저녁에 양꼬치를 안주로 맥주 한 잔 가볍게 하기로 했다.

09. 같은 병실에 있다 퇴원해 외래로 물리치료 받으러 오는 이가 있다. 건장한 사십 중반의 사내로 걷는 자다. 왼 발목 아래의 신경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아 발목에 카포를 차고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며 걷지만 환자들 사이에서는 일반인으로 분류될 만큼 상태가 양호하다. 섭생과 대소변에도 아무 문제가 없고 이동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한 시간 가량은 운동삼아 걸어다닌다. 병원에 있을 때도 대부분의 저녁은 외식으로 해결했고, 상봉까지 걸어갔다 왔네 면목역 칼국수집이 죽여주네 엉덩이에 근육이 많이 붙었네  걷는 자세가 돌아오고 있네, 자랑하듯 말하곤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마지 척수장애인들을 상대로 은근히 자신의 아픔과 절망을 호소해 뒷담화의 표적이 되기도 했었다. 똥오줌도 못 가리는 마비 환자가 걷는 자의 불평을 들어줄 여력이 있겠는가. 나도 두어 번 그런 소리를 들어야했는데, 그래. 타인의 능지처참보다 칼에 벤 제 손가락 끝이 더 아프고 실질적인 것이지. 그것은 비교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이겠지. 제 상처가 가장 깊고 제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니. 그렇게 이해하고 수긍하며 지나갔었다.
그가, 그 걷는 자가 치료시간을 기다리며 볕을 쬐고 있는 내게 살짝 절룩이며 다가와 말한다. 몸 좀 어떠세요? 묻고는 늘 그랬듯 상대방의 대답 따위 무시하며 바로 말을 잇는다. 저 요즘 몸이 정체기인 것 같아요. 안 올라오네. 이래서야 어디 제대로 된 삶을 살겠는지. 멀쩡한 것 같지만 밖에 나가면 완전 장애인이라니까요. 취직이나 하겠냐고요. 그래 안다. 당신의 입장 당신의 걱정 이해한다. 고군분투 당신의 삶이고 당신의 우주이니. 당신 발목의 마비가 내 배꼽 아래 마비보다 중하고, 가타부타 비교하여 등급을 메길 수 없는 아픔들이니....... 생각하는데 그가 치료실로 들어가며 한 마디 한다. 형님이나 나나 뭐 다 도찐개찐이죠. 순간 이해고 지랄이고 그가 짚고 가는 지팡이를 빼앗아 튀통수 한 대 딱! 치고 싶어진다. 때리는 나나 맞는 너나 도찐개찐이다. 요놈아. 이런 멘트도 날려주면서. ㅎ

07. 세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 를 복역 중인 재소자들이 배역을 맡아 공연하는 연극 프로젝트에서 카시우스로 분해 빙의된 듯 몰입했던, 살인 및 기타 범죄로 종신형을 살고 있는 코시모 레가. 열연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와 독방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가만히 서서 방을 둘러보다 혼잣말을 한다. "예술을 알고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군."
타비아니 형제가 감독한「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마지막 장면이다. 훗날 코시모 레가는 종신수인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출간했다 한다. 그가 잠시 카시우스로 살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의 말대로 '예술을 알'지 못했다면 자신의 삶을 글로 엮지는 못했을 것이다. 좀 비약적이 뜬금없다 싶지만 이런 생각을 덧붙여 본다. 코시모 레가가 자서전을 쓰게 된 '계기'는 줄리어스 시저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시저의 죽음이 세익스피어의 희곡으로 태어났고, 그 후로 셀 수도 없는 무수한 무대에서 새롭게 죽었던 그 '죽음'이 서기 이천십삼 한 교도소에서 다시 생생하게 죽음으로써 연극에 참여한 재소자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비아니 형제가 선택한 영화 제목처럼 '시저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05. 7층 재활치료실 앞 통창에 바짝 다가앉아 내 키보다 훌쩍 큰 드라세나 아래에서 볕을 다. 드라세나의 심란하게 헝크러진듯한 길쭉한 잎들이 얼굴과 환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팔꽃 연두잎들이 몸을 밝히며 드라세나의 곧은 줄기를 오르고 있다. 바깥 세상의 바람과 대기를 모르니 햇살만으로 다 익은 봄처럼 따뜻하고 평화로운 오후다. 띵똥. 메시지를 여니 누님이 서석에서 복수초를 보내셨다. 투박한 갈색을 배경으로 밝고 노랗고 통통한 것이 귀엽고 탐스럽다. 눈과 얼음 사이를 뚫고도 나온다는 요 당돌한 것. 복과 목숨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하지. 과하다 싶지만 그건 사람의 바람일 뿐 너와는 아무 상관 없으렸다. 복수초에서 복수초 아님을, 네가 있어 내가 있음을 감각적으로 본다. 우얐던동 여기 저기서 매화가 피고 노루귀가 피고 변산바람꽃이 피는 소식이 들려온다. 작년 이맘 때에는 봄소식이 멀고 힘겹게 느껴졌었는데 오늘은 가깝고 대략 다정하다. 이왕 오시는 거, 어서오시라.

04. 병원 근처 저렴한 동네횟집에서 저녁 먹으며 나눈 대화.
1
나 : 아들, 담임 샘 어떠셔?
온 : 무서워. 신경질 내고 소리 지르고 그래. 첫날에 한 애가 까불다가 엄~청 혼났어.
나 : 그랬구나. 반 친구들도 쫄았겠네. 넌 어땠어?
온 : 나? 나도 쫌. 김치찌개처럼 쫌 쫄기는 했지. 근데 이젠 괜찮아. 왜냐면 선생님이 똑똑한 사람을 좋아한데.
나 : 하룻만에 괜찮아진 거야? 멘탈 갑이네. 우리 아들. 근데 선생님이 똑똑한 사람 좋아하는 거랑 니가 괜찮은 거랑 뭔 관계가 있어?
원 : 아, 티긑엄마가 담임샘 정보를 줬는데 평판이 영. 아이들을 쥐잡듯 잡는데. 질문도 못하게 하고. 아무튼 티긑엄마가 온이한테 '니가 자유로운 영혼이라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 선생님이 똑똑한 아이를 좋아하고 니가 똑똑하니까 그걸로 잘 어필해서 잘 지내길 이모가 기도할 게'라고 했거든.
온 : 어제 준비물 하나 빼먹었는데 다른 애들보다 조금 혼났어. 내가 똑똑하니까 그런 거지.
나 : 오~ 자신감. 근데 이제 이틀 지났는데 선생님이 너 똑똑한지 어떻게 아시냐?
온 : 다 느낌이지. 그런 느낌이 딱 왔어.
2
온 : 아빠, 된사람 난사람 든사람 그거 알지? 아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나 : 아빠? 음....... 셋 다.
온 : 욕심은 알겠는데, 딱 하나만 골라 봐.
나 : 된사람.
온 : 된사람? 나도 그건데. 왜 그러냐면 아빠 잘 봐봐. 된사람은 착하고 성실하지? 그럼 공부를 열심히 하겠지? 그럼 지식이 쌓여서 든사람이 되겠지? 그리고 그 지식을 좋은데 쓰면 난사람이 되겠지. 그래서야. 그래서 된사람이 될라는 거야.

03. 영화 나무 없는 산」마지막 장면. 아이 둘이 양지바른 길따라 집으로 가며 노래 부른다. "산으로 올라가고 싶어 산 뒤로 내려오고 싶어 강에서 헤엄치고 햇빛 쬐고 모두에게 잘, 하고 싶어." 나도 따라 부른다. 산으로 올라가고 싶어 산 뒤로 내려오고 싶어 강에서 헤엄치고 햇빛 쬐고 모두에게 잘, 하고 싶어.

02. 스무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된 조에 부스케. 대략 년에 걸쳐 절망에 고통스러워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정신을 고양시켜 작가가 된 그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이진경이 말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작가로서의 삶을 통해 그는 불구가 된 자신의 신체를, 그렇게 불구로 만든 그 '사고'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망가진 신체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망가진 신체 그대로."
비슷한 생각을 한 바 있다.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사고인 '우연'을 삶의 새로운 전환점으로 만들어 그 사고가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사건인  '필연'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 불구의 몸 그대로 불구를 잊는 경지에 대해. 하여 이진경의 글을 고개 끄덕이며 긍정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 지금 너무 멀쩡한 것 아닌가? 비록 젊었으나 부스케는 참담한 절망에서 심히 괴로워하기를 몇 년이었는데, 이제 년 조금 지난 나는 깊은 절망도 없이 '사건' 운운 '필연' 운운하고 있는 것 아닌가? 어쩌면 전환의 에너지일 절망에 인색하지 않은가? 지금 나, 너무, 고요한 것 아닌가?

01. 바흐의 파르티타 1번을 안드라스 쉬프의 피아노 연주로 듣는다. 들을 때마다 새롭고 낯설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음을 감지하고 기억하고 멜로디로 재구성하는 능력, 즉 음악적 감각이 평범하기 때문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오늘 이런 생각이 든다. 쉬프가 연주하는 파르티타 1번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다른 나'였고 '다른 나'이고 '다른 나'일 테니, 그렇게 늘 다른 내가 그의 연주와 만나는 것이니 새롭고 낯선 게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겠나. 파르티타 1번을 완벽하게 기억해 건반으로 풀어내는 쉬프도 연주할 때마다 '다른 쉬프'이니 늘 차이가 존재하는 '다른 곡'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기계를 통해 들려오는 음원이 물리적으로 동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음원을 듣는 사람마다 다른 코드로 접속할 테니 그 사람들의 수만큼, 아니 같은 사람이더라도 들을 때마다 다를 테니 재생되는 수에 비례하여 언제나 '다른 곡'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늘 새롭고 낯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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