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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6. 21. 08:01

29  이른 아침, 소변을 뽑을 시간이 되어 일어나 앉았는데 붉은 것이 눈에 훅 들어왔다. 뭐시여? 허리를 숙여 들여다보니 왼발 엄지발가락과 이불에 피가 묻어 있었다. 짚이는 바가 있어 어렵사리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상처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다리를 포갠 뒤 벨트로 묶고 모로 누워 잠이 들었는데 밤새 강직 때문에 다리가 계속 움직였을 것이고, 그 와중에 왼발 엄지발톱이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쪽과 계속 마찰을 빚으며 살을 긁다 끝내 파냈을 것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니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이 알 수는 없는 일. 피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며 생각했다. 아픔을 모른척한 채 헤헤 웃으며 살다가 아픔을 모르게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구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아픔이라는 걸. 췟!

 

25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 잡은 양평군장애인복지관 주차장에서 볕을 쬐고 있다. 얼마 전 2년 가까이 대기 중이었던 재활치료 차례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오늘부터 1주일에 하루, 30분씩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를 연이어 받기로 했다. 치료나 운동이라기 보다는 마실에 가까울 것이다. 

 

22  창문과 문 사진들을 페북에 올리고 나니 뭔가 가볍고 홀가분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반응이었다. 이유가 뭘까 들여다보았더니 잊고 있던 미련이 떨어져나간 거였다. 골목을 걸었던 나에 대한 미련과 이 사진들로 무언가를 도모해보려 했던 미련이. 그렇게 기억의 한 쪽이 편안해지면서 '지금'의 무게도 줄어들었다. 지금이 과거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21  페친이신 사진가 김모님 페북에서 광주시 서동 골목의 창문 사진을 보다가, 나도 한 때 골목의 창문을 탐하던 때가 있었더랬더랬지, D드라이브로 들어간다. [디카] 폴더 안의 [골목] 폴더를 클릭하니 [계단] [등등] [문] [벽] [의자] [집] [창문] 폴더가 나타난다. [창문]으로 들어간다. 2005년부터 다치기 전 해인 2014년까지 십 년이 열 개의 하위 폴더로 차례로 줄지어 있고, 그 뒤에 [대추리] 폴더 하나가 독립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림이 꽉 막혀 갑갑해하던 차였다. 그래, 이렇게 그림이 풀리지 않을 땐 쓸데없고 괜한 짓이 또 보약이 되기도 하는 법. 자, 십 년 동안 어디를 쏘다녔는지 차근히 살펴볼까?

남가좌동 북가좌동 상계동 상암동 신촌 성수동 수색동 신계동 인사동 중곡동 증산동 종로 갈현동 견지동 공덕동 구의동 군자동 길음동 낙원동 능동 답십리동 무교동 면목동 보문동 북아현동 삼청동 상수동 성북동 성산동 송월동 숭인동 신교동 신설동 신사동 연남동 옥인동 용답동 용두동 응암동 제기동 익선동 종암동 중동 증산동 창신동 천연동 경운동 관수동 광장동 구로동 교남동 노고산동 대흥동 도선동 동교동 동숭동 무악동 미근동 방화동 불광동 서교동 신수동 연희동 영천동 용강동 왕십리동 익선동 평동 충정로 체부동 현저동 홍은동 홍제동 녹번동 대조동 등등 서울의 강북이 압도적이다. 양평에 내려온 2011년 중반부터 골목 사진이 급격히 줄어드는데 골목도 한정적이었고 삶이 공황이어서 창문을 찾아다닐 겨를도 없었다.

2014년까지 다 살펴본 뒤 눈을 감는다. 이어폰을 끼고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구석구석 걸어 다니는 내 뒷모습이 보인다. 등에는 달팽이집만한 배낭이 걸려 있다. 내가 다가가 주목하는 창문들은 대개 막혀있거나 닫혀 있다. 어둡다. 생각한다. 그때 나는 왜 낡고 어긋나고 흠집이 많은 창문과 친하게 지냈을까? 빛과 바람을 받아들이고 공기를 환기시키며 외부와 소통하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창문의 ‘쓸모없는 쓸모’가 그때의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외부를 욕망하면서도 소통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어두운 내부에서 지리멸렬하게 살던 나를 창문에 빗댄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는 일이니 대강 짐작해볼 뿐이다. 그 사이 내 뒷모습이 골목을 빠져나간다. 골목 끝을 비추는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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