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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11. 11. 11:59

10  2001년부터 시작돼 한 해도 거르지 않았던 원소리의 김장이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집이 팔려 내년부터는 이곳에 올 수 없으니 마지막 김장이었다. ‘마지막’이여서 색다른 감정이 올라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회한이 적었고, 감회도 평범했다. 약 20년 간의 원소리 김장은 이분들이 있어 가능했다. 엄마, 아버지, 누나, 다리박, 제수씨, 바구니 그리고 원. 심심한 고마움을 전한다.

 

09  정엽선배와 박건샘이 다녀가셨다. 정엽선배는 목포 전시에서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며 [잇몸을 잃다]를 구매해주었고, 박건샘은 자신의 작업의 일환으로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07  IDRlabs.com이라는 곳에서 진행하는 ‘해리 포터 정신병리 테스트’를 해보았다. 강박을 상징하는 ‘헤르미온느’가 53%로 가장 높게 나왔다. 그 뒤로 분열, 자기애적, 우울, 반사회적, 과잉행동, 연극성 순으로 나타났다. 헤르미온느 그레인저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았다.

[질서, 통제와 관련된 문제에 집착하는 헤르미온느는 모든 것이 계획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매우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인생관을 따라 나아갑니다. 그녀의 생산적이고 성취도 높은 “A 타입” 성격은 강박관념적 성격 구조에서 가장 쉽게 인식되는 성격입니다. 그녀는 높은 기준과 불의에 맞서는 의로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며, 항상 도전을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는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때때로 그녀를 도덕주의자처럼 인식하게 만들곤 하지만, 심리적으로 그녀가 가장 높은 잣대를 적용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입니다. 스스로의 높은 기준에 시달리는 그녀의 강직함은 사실 엄습해오는 실패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과도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때의 공포를 막기 위한 방패입니다.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의 스트레스와 재난에 대한 환상을 중화하고 성취와 업적을 향해 바깥으로 향해 언제나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녀의 병리는 순전히 자신에겐 긍정적일지 몰라도 친밀감, 즉흥, 감정과 관련된 문제, 즉 강박적인 일상에서 벗어난 일들과 싸워야할 것입니다.]

다치기 전이었다면 전혀 나와 맞지 않는 결과라며 내쳤을 것이다. 헌데 지금은 나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이 부분은.

‘심리적으로 그녀가 가장 높은 잣대를 적용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입니다. 스스로의 높은 기준에 시달리는 그녀의 강직함은 사실 엄습해오는 실패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과도한 기준을 충족키지 못할 때의 공포를 막기 위한 방패입니다.’

 

06  페친의 담벼락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나오는 한 구절 ‘기다린다는 것은 태양이 한 바퀴 돌 동안 땅 속에서 내내 잠을 자다가 드디어 삭을 틔우는 씨앗과 같아.’을 ‘시를 읊듯’ 들려주는 에피소드를 읽고 댓글을 남겼다.

‘아이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이번 겨울은 무언가를 해내려고 애쓰며 조급해하지 말고, '땅 속에서 내내 잠을'자며 쉬어야겠다는. '싹을 틔'운다면 더욱 좋구요. 아이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댓글에 쓴 데로 올 겨울은 개인사 최초로 드로잉이라는 걸 하면서 잠을 자듯 쉴 계획이다.

 

05  에우클레이데스가 쓴 [원론]에 등장하는 수많은 정의 중 첫 번째 정의는 ‘점은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부분이 없다는 것은 전체요, 하나라는 것. 부분이 없는 그래서 비교가 없는 온전한 점이어서 선이 되고 면이 될 수 있으리라. 원자도 점이고 지구도 점이고 베텔기우스도 점이고 우주 전체도 하나의 점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주가 상상할 수 없는 밀도의 한 점으로부터 시작했듯이 하나의 티끌이나 먼지에 우주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 공空과 점點.

 

04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불편한 몸에 짜증이 났다. 들고 있던 물건이 떨어지거나, 강직으로 인해 다리가 떨리거나, 오고 가다 휠체어가 무언가에 걸리는 등 평소 늘 있어왔던 일들임에도 욱해 봄을 부르르 떨거나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욕을 날리기도 했다. 작은 집 안에서 그렇게 검은 황무지에 혼자 떠돌고 있는 것처럼 정처 없었다. 그러다 생각했다. 전에 다치고 난 뒤 더 깊은 절망에 다다르지 못한 걸 후회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절망이 아니라 그 상황과 나에 대해 불같이 성질을 내고 욕을 퍼부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감정을 누르지 말고 그 원초적인 감정을 유치하다 감추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 충분히 들여다보고 발산하고 겪었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03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맞는 아버지의 생신. 원소리에 식구들이 모였다. 마른멸치와 생양파와 고추장, 진녹색 사기잔에 단정히 담긴 날계란, 떨어지지 않도록 시켜 드시던 사과, 씀바귀, 김치, 생선 등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들을 차려 간단하게 절을 드렸다. 죽은 자를 위한 생일이라니. 동생 말대로 산 자들은 알 수 없는 곳에서 부피도 질량도 없는 에너지로, 공의 경지로 투명하시려나?

 

02  파울루 코엘류가 전하는 글쓰기 팁 8가지 중에서 다섯 번 째 팁인 ‘노트 메모’에 관한 글

[아이디어를 사로잡길 원한다면 놓칠 겁니다. 감정들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당신의 인생을 사는 걸 잊을 겁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사는 게 아니라 그저 관찰자가 될 것입니다. 노트 메모를 잊으십시오. 중요한 것은 남을 것이며,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떠나갈 겁니다.]

그림을 구상하고 만들어갈 때 ‘아이디어’에 사로잡히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성찰해야 한다.

 

01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걷거나 달리는 걸 볼 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일까,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배우가 앉아서 또는 누워서 사소하게 발을 움직이거나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장면을 볼 때면 그게 그렇게 부럽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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