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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9. 11. 23. 14:47

29  전체관람가 등급인 [겨울왕국 2]에 ‘노키즈존’ 운운이라니. 개인에 따라 아이들이 불편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거부를 공식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배제와 차별을 받아들이고, 사회 구성원인 개인에게 그 배제와 차별을 내면화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 휠체어 장애인이 탑승하면 불편을 느끼고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노장애인존’ 전철을 만들자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혐오와 차별과 배제는 어떤 경우에도 권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28  작품 인도와 매매 계약서 작성을 위해 오산시립미술관으로 가며 아내가 들려준 리얼리티와 액츄얼리티. 한 수 배우며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연결해보다.

 

27  얼마 전 양평청소년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마친 뒤 아이는 더 이상 리코더를 불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여 유일한 소프라니노 리코더 연주자로 솔로 파트를 담당했던 2년간의 퓨전오케스트라와 1년간의 양평청소년오케스트라 활동을 오늘로 마무리 지었다.

원 : 아들, 아쉽지 않아?

온 : 전혀. 할 만큼 했으니까. 시원해. 북으로 가면 되지. 크 크. 근데 엄마, 이번에는 처음으로 첼로 독주가 있더라. 첼로는 원래 베이스를 깔아주기만 했었는데 독주로 하니까 멋있더라고.”

원 : 첼로 그렇게 하기 싫어하더니 그래도 듣는 건 괜찮은가 봐?”

온 : 첼로 정말 싫었지. 그래서 금방 때려치웠잖아. 근데 오늘 다른 사람이 하는 거 들어보니까 소리가 좋더라고. 멋있었어. 이런 거지. 내가 우리 반에서 ○○이 싫어하는 거 알지? 그렇지만 ○○이가 좋은 일을 하면 칭찬할 수 있는 거지. 싫어하는 거랑 칭찬하는 거랑은 별개니까.”

원 : 오! 사온. 별개로 생각을 하다니. 쉽지 않은데. 멋져. 감동이야.

온 : 이게 멋진 생각인가? 당연한 거 같은데.

 

26  물리치료와 작업치료 사이의 짬 시간. 장애인복지관 후문을 밀고 나와 데크 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하늘은 맑고 풍경은 선명하다. 어깨를 뒤로 젖히며 몸을 펴 햇볕을 한껏 쬔다. 몸이 따뜻해진다. 심호흡 몇 번 한 뒤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본다. 닫은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 빛이 눈 감은 세상을 짙은 주황으로 만든다. 태양을 설명하는 사진이나 영상에 등장하는 그 짙게 불타는 주황. 태양의 표면. 한참 주황과 주황을 배경으로 검고 흰 먼지들이 움직이는 풍광을 바라보다 실없이 생각하기를, 눈꺼풀의 두께에 태양과 나의 거리가 들어 있구나. ㅎ

 

25  객관적이라는 미명 하에 제3자의 시선으로, 비평거리를 찾아 분석하며 건조하게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그렇게 삶과 세상을 해석하려고 애쓰며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애초에 오류인 의식의 정보들로 관념을 만들고 그 관념에 갇힌 채. 기껏 불완전한 언어를 기반으로 사고하면서. 만지고 느끼고 껴안고 울고 웃지 않으면서. 재미 하나도 없게.

 

24  며칠 전 페북을 통해 보았다. 11월 21일 자 경향신문 1면. 2018년 1월1일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1천 2백 명의 이름들. ‘박○○(49·떨어짐)’의 형식으로 박혀 있는 깨알 같은 활자.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끼어 죽고 부닥쳐 죽고 뒤집혀 죽고 맞아 죽은 죽음의 기록. 오늘도 반복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죽음의 자리에서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죽음.......섬뜩하고 아팠다. 두 손 모아 죽음에 안녕을 빌었다. 그러다 오늘 뒤늦게 깨달았다. 잊고 있었구나. 나도 산업재해로 걷지 못하게 된,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아 있는 건설현장 노동자였다는 것을. 자책하며 울었다. 

 

23  아주 사소한 기쁨 1_아침에 일어나 붓기가 빠져 힘줄이 드러난 적당히 마른 발을 볼 때.

 

22 아내가 조카에게 선물하려고 산, 세스 노터봄이 쓰고 금경숙이 옮긴 「유목민 호텔-시간과 공간에서의 여행」을 펼쳐보았다. 첫 장 첫 문장이 이렇게 시작된다.

[“존재의 근원은 움직임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부동성이 들어설 자리가 없으니, 존재가 움직일 수 없다면 그 원친인 무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정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도, 또 피안의 세계에서도.” 12세기 아랍 철학자인 이븐 알 아라비가 한 말은 여행에 관한 그의 소책자 「여행의 서」에 실려 있다. 이 종교서는 모든 것-신·우주·영혼-을 움직임이라는 모습을 통해 보고, 이 움직임을 책 전체에 걸쳐 시종일관 여행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잊고 있었던 여행자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21  꿈을 꾸었다. 체육관 링 위에서 이종격투기 전문가에게 타격을 배우고 있다. 서로 붙어 주먹을 주고받지만 실전은 아니어서 아프지는 않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전문가의 몸은 단단한 근육으로 재빠르다. 전화가 와 받는다. 인테리어 업자인데 벽에 못을 박을 수 없다고 투덜댄다. 집에 도착하니 업자는 여자인데 검은 바탕에 빨간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윈피스를 입고 있다. 베란다에 비스듬히 누워 요염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벽이 너무 단단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고 간지럽게 말한다. 해머드릴을 사용해 구멍을 뚫고 나사못을 박으라고 설명해주고 체육관으로 돌아와 다시 링 위에 오른다. 머리를 상대방의 가슴에 박고 연거푸 주먹을 뻗는다. 위빙을 하며 그의 주먹을 피하기도 한다. 그러다 눈을 들어 상대방을 보는데 전문가는 어디 가고 그는 나다. 내가 나와 주먹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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