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

노트 2020. 9. 12. 12:18

19 원주에서 서울로 돌아가던 천일씨가 전화했다. 지평에 있는 용민선배 작업실에 가볼 의향이 있느냐고. 코에 가을바람 좀 넣어볼까 싶어 응했다. 얼마 후 천일씨가 와 나를 싣고 출발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큼직하니 하얗고 나무와 풀과 풍경에 햇살이 빛나는 것이 그야말로 가을가을 했다. 지평 곡수에 도착했다. 작업실로 들어서는 길 입구에 선배가 마중 나와 있었다. 햇빛을 받아 찡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길러 질끈 묶고 다녔던 머리카락을 바싹 밀었는데 백발에 가까웠다. 눈과 볼은 더 들어간 것 같았고 안 그래도 밝은 회갈색이었던 눈동자는 피부색과 비슷해 투명해보였다. 나무와 식물에 둘러싸인 실내로 들어갔다. 작업실은 어둡고 허름하지만 단정했다. 완성한 그림들과 빈 캔버스가 천정 아래 나무 틀 위에 차곡차곡 서 있었다. 물감과 붓, 보조제들과 캔버스 제작 도구들이 줄과 각을 맞춰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서로의 근황과 기억을 공유하는 시절의 오래된 이야기들과 작금의 사태들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선배가 듣고 있던 클래식 방송에서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 1번 A단조 1악장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피아노의 리듬을 따라 손가락을 까닥이다 문득 생각했다. 아! 작업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17  아내가 카톡을 보냈다. 주황색 구름 사진이었다.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얼마 후 귀가한 아내가 말했다.

오늘 구름은 정말 멋있었어. 흔히 볼 수 없는 희한한 색인데다가 구름마다 빛과 그늘이 어우러져 생전 본 적 없는 저 세상의 것들 같았어. 하늘과 구름과 노을이 훤히 보이는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생각했다. 노을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면 좋겠다고. 태초부터 멸망까지 하루도, 한 순간도 같지 않을 노을을 매일 본다면 참 좋겠다고.

 

16  몸과 마음이 계속 처져 한 달이 넘도록 붓을 들지 않고 있다. 2018년 3월 이래 지금까지 이렇게 오래 쉬기는 처음이다. 그렇다고 휴식도 충전도 공부도 아닌, 나태와 무욕. 반복되는 허무의 상념. 목적 없는 생각의 소비. 관성이 되어 계속 더, 끝없이 이 상태로 굴러갈 것만 같아 문득 겁이 났고 구해줄 계기가 필요해 덥석 전시장을 계약했다. 1년간 할 일이 공식적으로 생겼다.

 

13  눈을 뜨니 7시가 넘었다. 이런, 늦잠을 잤네. 얼른 일어나 바삐 소변을 뽑고 창밖을 보니 하늘이 맑고 파랬다. 창가로 엉덩이를 옮겨 창문을 열었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여러 소리들이 들어왔다. 가까이서 우는 닭과 거위, 개구리 소리와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새들의 높고 맑은 지저귐, 멀리서 점점이 짖으며 소리의 원근을 완성하는 개들. 평면에 살고 있던 네가 입체의 세상을 만나는 듯했다.

 

12 엊그제부터 핸드폰이 충전되지 않았다. 컴퓨터로 핸드폰의 파일을 옮길 수도 없게 되었다. 양평에서 가장 가까운 서비스센터인 구리까지 들고 나가 고쳐 온 아내가 말했다.

단자에 습기가 차서 부식되었다네. 단자 교환에 5만원. 내 것도 점검해봤는데 아주 깨끗하다는구만. 전철을 타고 오며 생각해봤어. 나랑 한 날 한 시에 같은 기종으로 구입한 건데 왜 당신 것만 부식이 되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현재 당신의 상태, 아니 당신의 기저를 이루는 감정 상태가 슬픔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믿거나 말거나.

 

11  아내가 드라마를 볼 때 아이는 정작 앉아 같이 보지는 않으면서도 오며 가며 관심을 보인다. 간혹 서서 보며 드라마의 내용과 인물 관계도, 전개 과정 등을 묻기도 한다. 그러다 등장인물들이 썸을 타거나 밀당을 하는 걸 보게 되면 빨리 진도를 뽑으라고 재촉하고, 고백과 키스 등으로 연인이 되면 오, 예! 좋아라하며 박수를 치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드라마 막바지에 주연급 남녀가 첫 키스를 하자 아내가 컴퓨터를 하고 있던 아이에게 말했다. 아들, 드디어 키스한다. 키스해. 그러자 아이가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치더니 일어나 잠깐 춤까지 추었다. 물었다. 그렇게 좋냐? 아이가 답했다. 좋지. 세상 뭐 사랑 밖에 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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