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

노트 2020. 10. 3. 20:53

10  아이를 서종 ‘상상아트홀’에 데려다주고 삼십여 분을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말했다.

“날이 가을가을해서 당신 생각이 났네. 힘들겠지만 나갑시다. ‘굳이’ 하자고. ‘굳이’ 하지 않으면 이 가을 몇 번이나 더 만나보겠소.”

가을 햇빛이 숲과 나무와 꽃과 강물에 부딪혀 반짝이는 풍경 속을 달렸다. 9년 만에 중미산 고개 포장마차에서 칼제비를 먹었고, 조안면에 들러 친구를 만나 수다도 떨었다. ‘굳이’ 나서지 않았으면 누리지 못했을 시간과 공간과 관계의 순간들. 땡스, 원.

 

09  기립기에 서서 파란 하늘을 보다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맑고 시원한 날, 바람 불고 새들이 지저귀는 낯선 시골길을 걷다 몸과 마음이 천천히 흩어지며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라지며 웃는 내 모습. 흩어진 에너지들이 길가의 나무와 풀과 땅에 달라 섞이는.

 

06  ‘행복콜’이라는 이름으로 양평군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콜택시는 이틀 전에 예약을 해야 이용할 수 있는데, 예약된 차량은 대개 약속 시간 10분 전에 도착하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나가면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가끔 올리는 ‘장콜을 기다리는 시간’은 사실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기다림을 빌미로 일찍 집을 나서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맞고 풍경을 둘러보는 온전하고 독립적인 시간인 셈이다. 기껏해야 10여분, 약속 장소 반경 50미터 내외를 배회하듯 굴러다니거나 멍하니 앉아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나름 알차다.

 

05  석 달 치 방광약과 자가도뇨 처방전을 받기 위해 의사 진료를 마친 뒤, 다음 예약일과 안내문을 받기 위해 담당 간호사에게 갔다.

“3개월 후면.......”

컴퓨터로 달력을 살펴보던 간호사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와! 내년이네요? 2021년 예약은 처음이에요. 2021년 1월 4일 괜찮으신가요?”

듣고 있던 나도 깜작 놀랐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04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다 읽은 아이가 아내와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 _ 엄마, 다 읽었어.

원 _ 오! 갈매기의 꿈 어땠어?

온 _ 재밌었어. 명언이 하나 있더라. 높나갈멀본.

원 - 높나갈멀본? 높나갈멀본! 크 크. 그렇게 사는 건 어떤 것 같애?

온 _ 좋겠지? 근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원 _ 살다보면 그렇게 하고 싶을 때가 생길 거야. 높이 날고 싶고 멀리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거야. 그때 그렇게 해보면 되지. 뭐든 해보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벌써 고민할 필요는 없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아이가 말했다.

온 _ 엄마, 나 자연사 할 때까지 잘 살기로 했어.

원 _ 자연사? 크 큭.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온 _ 왜냐면 내가 2억 마리 정자들 중에서 엄마를 만나 유일하게 사람으로 태어난 거잖아.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해보고 막 살다가 일찍 죽으면 못 태어난 1억 9천 9백 9십 9만 9천 9백 9십 9 마리 정자들한테 미안하잖아.

 

03  서석을 출발할 때 아내가 말했다. 어제 누나가 횡성으로 가는 19번 국도가 좋다고 하더만. 한 번 가 봅시다. 우리가 언제 또 그 길을 달려보겠어. 그러고는 서석면 소재지를 빠져나오자마자 횡성군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바로 19번 국도가 나타났다. 50분 가까이 달려 횡성읍 가까이에서 헤어진 19번 국도는 한가하고 호젓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산과 길가의 나무들, 노랗게 펼쳐진 논들. 면소재지에 모여 있는 낮은 건물들이 반가웠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여행을 다니며 쓰고 되새겼던 그 수많은 말과 글들. 그 두서없이 진지했던 생각들은 다 어디가고 이렇게 빈약한 정신으로 멍하니 조수석에 앉아 있는가.

 

02 어두운 밤, 야외 데크에 앉아 술을 마셨다. 옆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적당해 듣기 좋았다. 음악을 들으며 형제들과 수다를 떨었다. Depeche Mode. Smokie. Ozzy Osbourne. 조성진. Ahmad Jamal. Jackson Brown. 소녀시대. The Alan Parsons Project. Journey. 양수경. Rebecca Pidgeon. 전영. Red Zeppelin. 우효. Reo Speedwagon. 장은아. Toto 등을 들었고 늘 그렇듯 Pink Floyd로 막을 내렸다. 머지않아 사라질 장면들....... 허무하고 허망하지만 그래서 이 순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01 아내의 배려와 수고 덕분에 엄마 집에서 하루 묵으며 동생과 술 한 잔 나누고 아버지께 절도 드리고 돌아왔다. 아이는 내내 스마트폰을 들고 할머니 침대에서 뒹굴었고, 집에서 하듯이 수시로 ‘엄마 사랑해요’ ‘아빠도 사랑해요’를 외쳤다. 전을 다 부치고 소맥을 하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아이가 또 불쑥 ‘엄마 사랑해요’를 외쳤다. 아내가 방으로 들어가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한테는 매일 하니까 여기 계신 분들한테 사랑을 표현하는 건 어떻겠냐고. 아이가 거실을 향해 즉각적으로 소리쳤다.

“모두 다 사랑해요.”

아내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뭉뚱그리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 콕 콕 집어서 사랑하면 좋을 것 같다고. 거실로 나온 아이가 리듬을 타며 랩을 하듯 말했다.

“할머니 사랑해요. 작은엄마 사랑해요. 작은아빠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 사랑해요.”

그러고는 자신의 가슴을 툭 툭 치며 덧붙였다.

“나 자신도 사랑해.”

다치고 나서야 겨우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한 나는 아이가 나와는 다른, 자신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해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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