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

노트 2020. 10. 14. 11:38

20  일어나 창밖을 보니 안개가 짙었다. 옳다구나. 오백만년 만에 옥천의 안개에 묻혀보자. 얼른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 딸기잼을 발라 빵 한 조각을 씹어 먹은 뒤 집을 나섰다. 허나 그새 옅어진 안개는 이내 사라졌다. 검은 그늘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마지막 안개 입자들이 마치 저무는 한 세상 같았다. 아쉬운 마음에 굴러다니며 벽의 금들을 살펴보다보니 장콜이 도착했다.

 

13  “검은목두루미는 노래할 때 누가 듣고 안 듣고는 신경 쓰지 않아요. 저처럼 그저 바치는 거죠.”

페친인 한 시인이 '시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며 인용한 영화의 한 대목. 시인은 덧붙였다. ‘검은목두루미의 저 태도를 우리는 정녕 가질 수 있을 것인가?’라고. 삶과 그림에 걸려 헤매고 있는 지금, 새겨볼 만하다.

 

12  나와 잠자리에 누운 아이가 뜬금없이 물었다.

온 _ 아빠, 첫사랑이 누구야? 이름이 뭐야? 첫사랑 이야기 좀 해줘봐.

일 _ 갑자기 웬 첫사랑? 하도 오래돼서 기억도 잘 안 나네.

온 _ 어떻게 첫사랑을 잊어. 이런 말 몰라? 첫사랑을 잊은 남자에게 다음 여친은 없다!

일 _ 크 크. 어디서 들은 말이야?

온 _ 어디서 듣긴, 내가 지어낸 말이지. 첫사랑이 누구냐니까? 아빠 얼굴에 연애 좀 해봤을 것 같은데.

일 _ 하 하. 첫사랑이라....... 고등학교 때. 이름을 이야기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편지 주고받았고 같이 시각장애인학교에 봉사도 갔고, 여기저기 걸어 다녔고 집에 바래다주기도 했고 쫄면도 사 먹고 그랬네. 뭐 근데 거의 짝사랑이었어. 아빠가 훨씬 더 좋아했으니까. 아고, 그때는 참....... 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근데 아빠 첫사랑이 왜 궁금한 건데?

온 _ 아빠한테는 좀 안 좋은 말일라나? 엄마가 첫사랑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엄마랑 결혼했다는 건 첫사랑에 실패했다는 거잖아. 그 첫사랑이랑 결혼 안 했으니까. 아빠가 뭘 잘못해서 실패했는지 알면 혹시 내가 나중에 연애할 때 같은 실수 안 할 수 있잖아.

일 _ 하 하. 연애의 끝이 꼭 결혼은 아냐. 결혼하려고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근데 너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한다면서? 혼자 편하게 살 거라면서?

온 _ 지금 생각은 그렇지만 세상일은 또 모르는 거니까.

 

11  한 달 넘게 가라앉아 있는 나를 건져 올리려 클래식과 재즈를 집중해 들었다. 말러의 <Symphony No. 4 in G major>,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림스키-코르사코프의 <Scheherazade>, Ahmad Jamal의 <But not for me>, Charlie Haden의 <Nocturen>, Miles Davis의 <Kind of Blue>, Joep Beving의 <Solipsism> 등. 들을 때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 했으나 약발이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헤매다 오백만 년 만에 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켈의 [나무의노래_자연의 위대한 연결망에 대하여]. 첫 밑줄을 그은 문장은 이렇다.

“비의 언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식물의 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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