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

노트 2020. 11. 1. 16:18

31  오랜만에 꿈속에서 뛰어다녔다. 아내와 연락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핸드폰이 사라졌다.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야 하므로 공중전화를 찾아 시내를 헤맸다. 겨우 겨우 힘들게 찾은 공중전화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기 일쑤였고, 어쩌다 빈 부스가 생겨 들어가면 전화기가 먹통이거나 낯선 사람이 받곤 했다.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기 위해 구멍가게를 찾아 한참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후배의 사무실에 들러 핸드폰을 빌렸으나 배터리도 간당간당 했고 번호 버튼도 잘 눌리지 않았다. 전화를 기다릴 아내 생각에 애가 탔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았으나 낯선 아이였다. 꽤 스마트한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파란 번호판에 은색 번호가 볼록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눌러보았으나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KTX 출입문 비밀번호 버튼이었다. 승무원이 나타나 문을 열고 들어가고 기차는 출발하려 기적을 울렸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중년의 아저씨도 공중전화로 착각하고 들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갈 곳을 찾아 버둥대다 천정 환풍구를 열고 빠져나왔다. 중년의 아저씨도 그곳으로 나오려 발버둥쳤고 그를 도와줄까 그냥 빨리 아내를 찾으러 갈까 고만하다 그를 꺼내준 뒤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마치 스파이더맨이 땅에 착지하는 모습이었는데 신발은 어디가고 검은 양말뿐이었다. 승강장과 역을 빠져나와 공중전화를 찾아 뛰어다녔다. 시내는 복잡했고 붐볐다. 분홍색 나팔바지를 입은 여자들이 단체로 줄을 맞춰 발랄하게 뛰어가며 무슨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끝내 아내를 만나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연락할 수 없는 긴장감과 쉬지 않고 돌아다닌 다리 때문인지 피곤해 한참을 누워 있었다.

 

29  네가 너무 성실하게 살다가 부러져버릴까 봐 나는 걱정이다. 유토야. 나는 가끔씩 생각한다. 삶은 어쩌면 선물이 아닐까 하고. 물론, 수없이 괴로운 일들도 많이 있었고, 소중한 친구들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 네 아버지 어머니를 만난 것, 그리고 너를 만난 것 이 모든 게 큰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선물에 감사하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유토야. 조금은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져도 돼.

_ 정지훈의 웹툰 [더 복서] 중에서.

 

28  얼마 전, 유튜브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리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다 듣고 나서 독백처럼 말했다. 한 번 읽고 싶구만. 귀담아 들은 아내가 잊지 않고 주문한 책이 깜짝 배송되었다. 조르바는 ‘자유’ 목 놓아 외쳤다고 들었다. 그 ‘자유’가 궁금했다.

 

27  장애인복지관으로 물리치료와 작업치료를 받으러 가는 날. 거의 유일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림 이야기도 하고 지난 8월 전시 팜플렛을 건넸더니 잊지 않고 보러오기도 했던 기사 분이 배정되어 왔다. 읍내로 가며 단풍이 물든 산을 보다 기사 분에게 물었다. 단풍철인데 주말에 산에 좀 다녀오셨느냐고. 그가 답했다.

“따로 단풍구경은 아니고 매주 산에 갑니다. 블랙야크에서 하는 행사가 있어요. 거기서 지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에 올라 인증하는 뭐 그런 건데 어쨌든 참여하고 있어서 매주 산에 가지요. 그러니 단풍은 뭐 원 없이 보게 되네요. 서울과 경기, 강원도 하고 충청도 쪽 산은 거의 다 올랐고, 이제 남도 쪽 산에 도전하고 있는데 멀어서 오고 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네요.”

그가 말을 마치자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의 감탄사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부러워요. 정말!”

 

25  일요일 아침. 아내가 말했다. 가을도 배웅할 겸 나갑시다. 도톰한 점퍼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산에서도 나무에서도 풀에서도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용문 시내에서 연수리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 노란 은행나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내가 말했다. 어떻소? 이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우리 이 가을 몇 번이나 보겠소. 많아야 한 30번 쯤? 그러니 귀찮다 마시고 맞이할 건 맞이하고 보낼 건 보냅시다. 우리 마누라 계획이 다 있었고만? 고마워하며 훅 훅 지나가는 가을을 감상했다.

연수계곡 옆에 자리 잡은 카페 겸 펜션에 주차하고 건물 뒤로 휠체어를 몰아 지면보다 20cm가량 높은 야외 데크에 올랐다. 여러 색으로 물든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햇빛이 많은 곳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건물로 들어가 지인과 인사하고 빵과 커피를 가져온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이 브런치라는 것이오. 브런치는 난생 처음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갈색으로 물든 나무 아래에서 별 말 없이 햇빛과 바람을 맞다 돌아왔다.

 

22  필연은 신의 것이다. 인간의 몫은 우연. 수많은 우연과 만나고 헤어질 뿐이다. 그 우연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맞닥뜨린 우연을 필연처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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