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

노트 2020. 11. 10. 22:01

10  동생이 카톡을 보냈다. 오늘은 얄님의 지구 체험 20,001일 째되는 날입니다!

 

08  나흘에 한 번, 좌약을 넣고 대변을 본 뒤 목욕을 한다. 대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가량 걸리는데, 화장실이 하나여서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끝내야 했으므로 아침 6시쯤에 일어나 공사(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 대변과 목욕의 시간을 간병인이 ‘대공사’라 칭했었다)를 시작했다. 퇴원하고 지금까지 3년 반 동안 변함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먹고 아이가 등교한 후, 그러니까 처음으로 9시가 넘은 시간에 공사를 시작했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었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이 바닥에 무늬를 새겼고, 움직이는 내 몸에서도 반짝였다. 더구나 샤워기에서 나와 내 몸에 부딪혀 물보라처럼 퍼지는 미세한 물의 입자들이 햇빛을 받아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생전 처음 해보는 햇빛과의 목욕이 삶의 순간에 산뜻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 햇빛을, 이 무지개를 삶의 순간 순간에 내가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03  돌아가신 뒤 두 번째 맞는 아버지의 생신. 장애인복지관 운동을 마치고 장콜을 기다리며 엄마에게 전화해 안부와 함께 물었다.

오늘 아버지 생신인데 어떻게, 미역국 끓여 드렸어요?

엄마가 헷 헷 웃은 뒤 답했다.

미역국은 무슨. 막걸리 한 잔 하고 날계란 하고 바나나 차려드렸지. 누나가 오늘 아버지한테 다녀온다더라. 홍천 납골당에. 너흰 별 일 없지? 너 아픈 데 없고?

전 아픈 데 없고 애미도 사온이도 다 잘 있어요. 날 추워지니 운동 다니실 때 조심하시고요.

알았다. 잘 지내고.

전화를 끊자마자 장콜이 달려왔다. 하늘도 맑고 울긋불긋한 산도 선명하고 바람도 차가운 정말 가을, 가을이다.

 

02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가 말했다. 나갑시다. 가을이 절정이라오. 니옙. 따라 나섰다. 아이를 읍내 독서교실에 데려다주고 아내는 양근대교를 건너 강하면 쪽으로 우회전했다. 지난주만 해도 연두가 남아있던 은행나무들이 죄다 노랗게 물들었고 길가에는 낙엽이 수북했다.

강하면에서 조성한 강가 공원에 주차했다. 내려서 조금 가니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산책길이 나타났다. 데크로 올라서 굴러갔다. 갈색의 수풀과 강과 강 건너 산을 보고 있는데 아내가 말했다. 잘 들어봐요. 바람소리. 아까 숲에 갔을 때 마른 잎들이 내는 소리가 참 좋았다오. 그래서 오늘은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지. 소리에 집중했다. 산책길 주위로 가득한 갈대 잎과 부들의 길고 뾰족하며 마른 잎들이 가볍고 얇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리들은 어우러져 스산하기도 하고 명쾌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조지 해스컬이 [나무의 노래]에서 ‘비의 언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식물의 잎이’라고 했는데, 잎은 바람의 언어 또한 매끈하게 번역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휠체어 바퀴가 데크에 떨어져 있는 낙엽을 밟을 때마다 바삭 바삭 꺾이거나 부서지는 소리도 듣기 좋았다. 나무 데크 끝까지 가 맑은 물을 헤엄쳐 가는 오리들을 응원하다 휠체어를 돌려 풍경을 되짚으며 돌아왔다.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22  (0) 2021.01.14
20121  (0) 2021.01.14
20103  (0) 2020.11.01
20102  (0) 2020.10.14
20101  (0) 2020.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