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2

노트 2022. 1. 2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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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째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마다 윱 베빙 Joep Beving의 2015년 발매 앨범인 <Solipsism>을 듣고 있다. ‘Midwayer' 'Etude' 등 11곡의 피아노 솔로가 수록되어 있다. solipsism은 ‘혼자’라는 뜻의 라틴어 solus와 ‘자기’라는 의미의 ‘ipse'의 합성어로, 세상에 오직 자기 자신 하나뿐이며 자신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학설인 유아론唯我論으로 번역된다.

오늘도 베빙의 곡을 들으며 창작지원공모 요강을 훑어보는데, 음악에 집중하지는 않았지만 반복적으로 들은 탓에 멜로디 터치를 따라 손가락으로 책상 표면을 건반 삼아 무심코 누르고 있었다. 응모 마감이 글피여서 촉박한데 바쁘면 딴 일이 하고 싶은 버릇에 말려 윱 베빙에 대해 찾아보았다.

네덜란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나 손목 부상으로 꿈을 접고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생활. 그러다 음악의 끈을 잡고 싶어 광고회사에 취직해 광고음악 제작. 2015년 첫 앨범 Solipsism 발매. 앨범 수록곡이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고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악을 하면서 스타덤에 오름. 음악적으로 빌 에반스 ,필립 글라스, 쇼팽, 에릭 사티, 아르보 패르트, 구스타프 말러, 키스 쟈렛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음. 세계 피아노의 날 기념 그라모폰 온라인 콘서트에서 키신, 조성진, 올라프손 등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연주.

내가 애정하는 필립 글라스와 아르보 패르트, 사티와 말러라니. 이어폰을 끼고 오로지 음악에만 몰입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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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 지원에 필요해 원에게 주민등록초본을 부탁했더니 상세 내역이 포함된 양식으로 발급받아왔다. 반나절 고민 끝에 지원하지 않기로 하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니 쓸모없어진 초본이 눈에 들어왔다. 집어 들어 훑어보았다.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았던 집들의 주소가 줄줄이 기록되어 있었다.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 서울시 서대문구 수색동 - 서울시 서대문구 진관내동 -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 -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 고양시 덕양구 현천동 -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 서울시 서대문구 북가좌동 - 서울시 은평구 불광동 - 양평군 양평읍 백안리 -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 양평군 옥천면 옥천2리 - 양평군 옥천면 옥천3리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나 이사를 다녔으니 딱히 고향이랄 게 없다. 정을 둔 곳도 없고 정주의 안락을 느껴본 적도 없다. 늘 머물다 떠날 경유지 같았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또 어디로 옮겨가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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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주방 일을 하다 뭔가 발에 밟혔는지 무릎을 접으며 맨발을 들어 올려 발에 묻은 티를 떼어내는데, 그게 그렇게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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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을 마치고 이것저것, 그러니까 지원 공모 결과 보고서 작성과 팸플릿 발송, 판매된 작품의 보증서와 액자 제작 그리고 배송, ci씨의 전적인 도움을 받은 작품 수납 선반 제작, 1박2일 간의 가족여행 등을 하고 나니 12월이 훌쩍 넘었다. 1월 16일까지 아이의 두 해 사진첩 만들고 일기를 정리하면서 놀기로 마음먹었고, 그대로 실행해 오늘에 이르렀다. 이르고 보니 슬슬 불안의 검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공허해서 허물어질 것 같으면서도 또 무언가 꽉 차 숨 쉴 틈이 없어 답답하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더 나은, 분명 새로운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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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禮 아닌 예’, 그러기에 ‘진정한 예’

· 또 사람들이 서로 ‘나는 나일뿐’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나’가 정말 ‘나’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너는 꿈에 새가 되어 하늘에 오르기도 하고, 물고기가 되어 연못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깨어난 상태인지 꿈꾸는 상태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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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이라는 목수가 나무를 깎아 거를 만드는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귀신같은 솜씨에 놀랐습니다. 노나라 임금이 보고 물었습니다. “자네는 무슨 기술로 이렇게 만드는가?” 재경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목수일 뿐,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한 가지 있는 합니다. 저는 거를 만들 때 기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고,

반드시 재계를 하고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사흘을 재계하고 나면 축하나 상을 받고 벼슬이나 녹을 타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닷새를 재계하고 나면 비난이나 칭찬, 잘 만들고 못 만들고 하는 생각을 품지 않게 됩니다. 이레를 재계하고 나면 문득 제게 사지나 몸뚱이가 있다는 사실마저 잊습니다. 이때가 되면 이미 공무니 조정이니 하는 생각도 없어져, 오로지 기술에만 전념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외부적 요인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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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가 이른 밤에 전화했다. 여기 용천리요. bdw 선생 만나고 헤어졌어. 여기까지 왔으니 형 얼굴도 좀 봅시다. 익산에서 올라와 얼굴 보자는데 마다할 수 있나. 두툼한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추웠다. 알루미늄 재질인 휠체어 림은 금세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손을 호호 불며 큰길로 굴러가다 집 쪽으로 걸어오는 ib를 만났다. 광주에서 온 js와 함께였다. 막상 만났으나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둘이 묵을 숙소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코로나방역수칙에 따른 음식점 영업 제한인 9시가 이미 다 된 시간이었다. 고민 끝에 혹시나 싶어 어쩌다 가는 편의점으로 갔다. 캐노피 야외 공간에 생각지도 않았던 커다란 화목난로가 불을 피우고 있었고, 마침 하나 밖에 없는 테이블도 비어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추위와 공간이 한 번에 해결되었다. 난로 옆에 앉아 나무 상자를 사이에 두고 동네 할아버지와 소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물주 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잡았다. 최대한 난로에 가깝게 붙어 앉아 편의점에서 구입한 과자와 족발을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며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멀리서 온 친구. 어두운 밤. 추위. 난로. 차가 다니지 않는 젖은 도로. 도로 건너 검은 숲. 풍경 한 쪽 끝에서 명멸하는 주홍색 신호등...... 더 멀리 더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바닷에. 춥고 눈 내린 길을 마구 밟으며 걸어서 가고 싶었다. 걸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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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블루투스 이어폰 하나 없나, 혼잣말을 했더니 원이 검고 두툼한 원반형 케이스를 건네주며 말했다. 땡겨 주는 생선!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지퍼를 열었다. anc 헤드폰인 remax rb-600hb였다. 오, 예! 감사. 바로 컴퓨터와 연결했다. acdc의 highway to hell로 성능을 확인한 뒤 개시 곡을 고민하다, 얼마 전 동생이 ‘25분의 비통함을 견딜 수 있다면’이라는 태그와 함께 sns에 올렸던 말러 교향곡 9번 4악장이 떠올랐다. 유튜브를 뒤졌다. 아바도가 지휘하고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한 2002년 도이치 그라모폰 발매 앨범을 찾아 4악장을 재생시켰다.

눈을 감고 집중했다. 도입부터 감정이 조금씩 주저앉기 시작했다. 무겁고 느리게 끊이지 않는 현의 유려하면서도 비장한 선율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가끔 변수처럼 관악이 나타나 긴장의 파문을 일으켰다가 다시 현에 흡수되었다.

눈 쌓인 끝없는 황무지를 겨우 걸어가는 한 점 같은. 지나온 날들의 비애. 내 삶에 배여 있는 허무와 불안. 날아다니다 사라지는 재. 느리지만 어디에나 있는 멈추지 않는 바람. 답을 찾을 수 없는 근원적인 어떤 물음. 세상으로부터 사라진 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라져 가는 슬픔. 알 수 없는 곳으로 가며 소진되어야 하는 자의 두려움. ‘죽어 사라지듯이, 주저하며, 극단적으로 느리게’라는 뜻의 지시어처럼 희망도 절망도 없는 어떤 마지막 지점을 향해 그야말로 주저하며 죽어 사라지듯이 걷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근본적인 슬픔...... 비통하지는 않았고 견딜 수도 있었지만 울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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