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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17. 10. 2. 15:34

09  팔당역에서 멀지 않은 유명한 식당에 앉아 독수리들과 오리고기를 주메뉴로 점심을 먹는다. ‘한민고 스타일’로 만 소맥도 곁들인다. 술은 역시 낮술이고 낮술은 역시 소맥이다. ‘독수리’는 원 대학시절에 선후배들로 은근슬쩍 구성된 원의 또 다른 가족이다. 마침 다섯 명이었고 마침 여자가 원 하나여서 자칭 ‘독수리5형제’라 불렀다. 지구를 구하겠다는 포부 따위는 전혀 없었고 먹고 마시고 가끔 공부도 함께 하는 구속력 없는 관계였으나 갈수록 끈끈해져 패밀리가 되었다. 2호의 아내는 3호인 원의 고등학교 절친이기도 하다. 이십대에 처음 만난 친구들인데 이제 모두 마흔 중반을 넘어서 제자리에서 성실하게 살아간다. 원이 힘들 때 세심하고 따뜻하고 진심어린 위로와 도움을 주었다. 원이 지금까지 몸담고 있는 유일한 사회적 인연이기도 하다. 때로 친족보다 더 살뜰하게 챙겨주어 나도 늘 고마워하고 있다. 서비스 국수로 입가심을 하고 카페로 건너가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뒤뜰로 나와 쉰다. 강 건너 딴 세상 같은 하남의 풍경이 보이고, 예봉산과 적갑산 사이의 활공장을 출발한 오색 패러글라이더들이 파란 하늘을 휘저으며 날다 뜰 앞 둔치에 연거푸 착륙한다. 오년 전 이었던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오늘처럼 오리고기로 점심을 먹고 아이와 뒤뜰로 나와 초여름 바람을 맞았었다. 식당에서 제공하는 고구마를 구워 먹고 알림 종소리와 함께 펑 터진 갓난 뻥튀기를 줄서 기다렸었다. 뻥튀기가 가득 찬 종이컵을 들고 계단을 내려가 풀만 자라고 있는 넓은 둔치를 가로질러 강 바로 앞까지 내려갔었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아이는 돌멩이를 주워 강에 던지기도 했고, 두서너 배 커지고 가벼워진 쌀알을 강물에 띄우며 깔깔 웃기도 했었다. 오늘, 그 아이는 삼촌들을 따라 강으로 가고 나는 그 뒷모습을 뒤뜰에 앉아 내려다본다. 어디를 가든 아직, 그곳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보다 지금 할 수 없다는 것에 더 집중한다. 예전에 행했던 동작과 행동들을 지금은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미련스럽게도 미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 나를 다그치지는 않는다. 대개 그러려니 한다. 이 미련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지나갈 것이므로.


07  오여사께서 점심 한 끼 쏘신다고 해서 전철을 타고 망우로 가고 있다. 휠체어 배려공간에 자리를 잡고 창밖 풍경을 보며 간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가득 가득 쉼 없이 이어서 떠 있다. 모양이 제각각이다. 한 터럭도 같지 않다. 보며 연상해본다. 악어 바다거북 아기돼지 강아지 버섯 사람의얼굴들 비룡 곰 똥덩어리들 해마 솜사탕 고래 물고기들 주먹 크로와상 비행접시 핵구름 사자 해삼 공룡 그리고 '구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구름들. 직선도 대칭도 정형도 존재하지 않는다.  구름은 무상無常의 전형이다. 한 순간도 같지 않다. 아마 지구가 생기고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나타난 후부터, 그러니까 수십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같은 구름이 펼쳐진 하늘은 없었으리라. 무상이어서 무아無我일 구름....... 오래 전에 한창 구름을 찍을 때 읽었던 이규보의 ‘백운거사 어록’을 인터넷을 열어 찾아 읽는다.


“늙은이가 이름을 숨기고자 해서 그 이름을 대신할 만한 것을 이렇게 생각하여 보았다. 옛 사람들은 호로써 이름을 대신한 이가 많은데, 호를 보면 대개 자기의 사는 곳을 가지고 호로 삼은 이도 있고, 자기 집에 있는 물건을 두고서 호로 삼은 이도 있으며, 또는 자기의 포부를 가지고 호로 삼은 이도 있으니, 왕적이 동고자東皐子라고 호를 지은 것과, 두자미가 초당선생草堂先生이라고 호를 지은 것과, 하지장이 사명광객四明狂客이라고 호를 지은 것과, 백낙천이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호를 지은 것은 곧 사는 곳을 가지고 호로 지은 것이며, 도잠이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고 호를 지은 것과, 정훈이 칠송처사七松處士라고 호를 지은 것과, 구양자가 육일거사六一居士라고 호를 지은 것은, 다 그 집안에 있는 물건을 두고서 호로 지은 것이며, 장지화의 호 현진자玄眞子와 원결의 호 만랑수漫浪叟는 자기가 가진 포부를 가지고 호로 지은 것이다. 나는 이들과는 다르니, 사방으로 떠돌아다녀서 거소가 일정하지 않고, 별난 물건도 소유한 것이 없으며, 소득의 실상도 없다. 이 세 가지가 모두 옛날 사람들에 미치지 못하니, 그 자호를 무엇이라 해야 좋은가? 어떤 이는 초당선생이라 지목하나, 나는 두자미 때문에 사양하였다. 더구나 나의 초당은 잠간 우거한 곳이요 상주한 데가 아니다. 우거한 곳을 가지고 호를 한다면 그 호가 많지 않겠는가? 평생에 오직 거문고, 술, 시 이 세 가지를 매우 좋아하였으므로 자호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 하였다. 그러나 거문고를 잘 타지 못하고 술도 잘 마시지 못하고 시 역시 잘 짓지도 못하면서 이 호를 가진다면 세상에서 듣는 사람들이 크게 웃지 않겠는가?그래서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고쳤더니 어떤 이가 ‘자네는 장차 청산에 들어가 백운에 누우려는가, 어찌 자호를 이렇게 지었는가?’ 하기에, 나는 ‘그런 것이 아닐세. 백운은 내가 사모하는 것일세. 사모하여 이것을 배우면 비록 그 실상을 얻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역시 거기에 가깝게는 될 것이네. 대저 흰구름이란 물체는 한가히 떠서 땅에도 머물지 않고 하늘에도 매이지 않으며 나부껴 동서로 떠나며 그 형적이 구애받은 바 없네. 경각에 변화하면 그 끝나는 데가 어딘지 알 수 없네. 유연히 퍼지는 것은 곧 군자가 세상에 나가는 기상이요, 염연히 걷히는 것은 곧 고인高人이 세상을 은둔하는 기상이며, 비를 만들어 가뭄을 구제하는 것은 인仁이요, 오면 한군데 정착하지 않고 가면 미련을 남기지 않은 것은 통通이네. 그리고 빛깔이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검은 것은 구름의 정색이 아니요, 오직 화채華彩 없이 흰 것만이 구름의 정상인 것이네. 덕과 빛깔이 저와 같으니, 만일 저것을 사모해 배워서 세상에 나가면 만물에 은덕을 입히고, 집에 들어앉으면 허심탄회 하여 그 흰 것을 지키고 정상에 처하여 무성無聲하고 무색無色하여 무한無限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면 구름이 나인지 내가 구름인지 알 수 없을 것이네. 이렇게 되면 고인의 실상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였다.어떤 이가 ‘거사라고 칭함은 어떤 경우여야 하는가? 라고 묻기에, 산에 거하거나 집에 거하거나 오직 도를 즐기는 자라야 거사라 칭할 수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집에 거하며 도를 즐기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더니, 또 어떤 이는 ‘이와 같음을 알고 보니 자네의 말은 통달한 것일세, 기록해두어야겠네’라 하였다.”


05  다치고 난 후 처음으로 혼자 잠을 자는 밤이다. 혼자 밤을 다 보내고. 많이 컸네.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저녁을 먹으며 영화 <마카담 스토리Asphalte>를 본 후 아마드, 쳇, 빌, 에디의 재즈를 들으며 지난 글들을 정리하고 있다. 시, 식물, 와유와 잡부일기, 사라진 블로그와 컴퓨터 여기 저기 처박혀 있는 골동의 잡문 등등. 올해는 이렇게 과거에서 살 것 같다. 모으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나면 미련도 과거에 조용히 자리잡을 것이다.


02  하늘이 맑고 날이 좋아 아이와 산책을 나선다. 언제나 쌩하고 내빼더니 오늘은 나보다 열 걸음 정도 간격을 유지하며 앞서서 간다. “아빠, 나 따라 와. 딴 데 가지 말고.” 간격이 벌어지면 자전거를 멈추고 기다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마트로 유인해 왔다풍선검 콜라맛을 사달라고 할 속셈인 거 뻔히 아는데 짐짓 모른 척 ‘어쩌다 마트로 가게 되는 컨셉’을 시전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쉬엄쉬엄 사진을 찍으며 따라가니 아이가 말한다. “아빠, 그렇게 가다가는 날 다 저물겠다.” 마트에 들러 콜과맛과 사과맛 풍선검을 사서 씹으며 기수를 집으로 돌린다. 이왕 나왔으니 마을 좀 산책하자고 했더니 더워서 빨리 들어가고 싶단다. 시월치고는 볕이 따갑기는 하다. “아빠, 집에 오면 엄마한테 전화 해. 내가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 올려줄 테니까.” 말 한 마디 남기고 냅다 달려간다. 나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천천히 마을을 돌며 창문을 찍는다. 하늘이 하도 쾌청해서 나도 총명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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