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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22. 1. 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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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려 햇빛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십여 분 일찍 집을 나섰다. 골목을 이루는 담 밑의 식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꼬부려 들여다보았다. 어여쁜 녀석들. 너희가 있어 내가 있다. 그렇게 천천히 굴러가는데, 이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길 위에 툭 툭 큼지막하게 점점이 찍혔다. 바퀴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려다 아예 길가로 나가 잎이 풍성한 나무 아래로 피신했다. 비밀 공간처럼 아늑했다. 장콜 타고 내릴 때 젖더라도 한차례 다이나믹하게 쏟아지기를 내심 기대했으나 이내 그치고 말았다. 싱거워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장콜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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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후배가 전화했다. 집이 팔려 5월 중순 전에 창고를 비워줘야 한다고. 자칭 모도니스트인 원은 바로 다음날 용달을 불러 남의 집 창고에서 8년간 먼지 먹고 있던 그림과 짐들을 싣고 내려왔다. 집 앞에 부려놓고 먼저 치워둔 베란다에 그림들을 차곡차곡 세워놓은 뒤, 버릴 것들은 버리고 쓸 만한 것들은 먼지를 털어 하나씩 하나씩 집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점심 먹고 기립기에 서 있는데 원이 웃으며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다. 연애할 때 그린 그의 얼굴이었다. 기립기 옆에 떡하니 올려놓고는 말했다.

“이거 그릴 때 그 마음 가끔씩 되새겨보시길. 그리고 윤스테이 정유미 알지? 돌아다니던 그 초상화. 이 그림도 그거처럼 언제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 긴장하시고. 크 크”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이가 다가와 그림을 보더니 언제 적이냐고 물었다. 25년 전이라고 하자 아이가 말했다.

“그래? 그런데 지금도 그림에 있는 엄마 얼굴에서 빛이 나는데?”

뻥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웃었더니 아이 왈,

“이 빛이 안 보인다고? 이 아빠, 사랑이 식었구만.”

그러고는 엄마를 보며 말을 이었다.

“엄마는 저 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우리 엄마 참 멋지셔. 나이 반백에 이렇게 청순하기도 쉽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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