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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2022. 1. 14. 10:07

11

본디 무심한 사람인지라 관계랄 게 별반 없는 생이었던 데다가, 서울을 떠나 양평에 자리 잡으며 그 빈약한 관계의 농도도 훅 옅어졌다, 다친 뒤에는 그나마 있던 인연도 소원해진 요즘, 거의 유일하게 전화해 안부를 묻고 간간히 찾아오기도 하는 친구인 c가 ‘캔버스 짜다가 박선생 생각이 나 몇 개 더 짰다’며 캔버스 다섯 개를 싣고 왔다. 캔버스를 내려놓고 옥천을 출발해 지평에 사는 선배를 찾아갔다. 허름한 셋은 허름한 시골 마을 식당에서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으로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를 했다. 여주로 접어들어 강 근처 길을 내달리다 이포보에서 내렸다. 강을 구경하다 전망대에 올라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하늘이 어둑해질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의 긴 나들이였다. 캔버스도 콧바람도 땡큐, c.

 

14

내가 못 보는 것일까. 보지 않으려는 것일까. 가려진 것일까. 아니면 애초부터 없던 것일까. 분명 눈은 감지 않았는데 볼 수 없다. 아름다운 것들.

 

16

점점 말하기가 힘들다. 명백하게 글쓰기는 더욱 더 어렵고 때론 두렵다. 갈수록 그렇다. 나와 타인, 세계에 대한 해석에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어서. 알고 있다는 게 ‘나는 모른다’는 것뿐여서.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으려는 비겁 때문에.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희망에 대한 상상력’이 보잘 것 없어서.

 

17

승영씨와 통화했다. 우중음주 후라 살짝 취해 있었다. 그가 말했다.

“형, 목소리도 듣고 싶었고 이 말도 해주고 싶었어. 형, 가방이나 집이나 뭐 그런 것들 그만 그리고 가방 안에 있는 것들을, 집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 거기에 형이 있잖아. 그걸 꺼내야 돼.”

취중이라 두서없이 말을 하다 ‘겉이 아니라 그 속엣 것을 꺼내야 한다’는 취지의 말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했다. 두 작품만 끝내면 11월 전시에 출품할 그림 작업은 마무리된다. 그 다음 생각, 그러니까 다른 생각과 또 다른 상상을 하는데 되새겨볼 만하다 싶다.

 

20

제주 월령리 사는 친구가 전화했다.

“아, 왜 카톡을 안 보는 것이여? 어제 보냈는데 기어코 안 보네. 신경질 나서 전화했구만. 어제 하루 종일 비 오다 저녁에 잠깐 해가 나서 집 밖에 나갔더니....... 어쨌든 일단 봐 봐. 먼저 봐야 돼. 보고 전화 해, 형.”

카톡을 열어 노을과 바다와 소리를 감상한 뒤 전화했다.

“죽이네.”

“죽이지?”

“근데 니네 집 앞에 이런 데가 있었던가?”

“왜 있잖아. 여름이면 생기는 조그만 모래사장.”

“아, 마을 입구에 있는? 주차장 있는 데 있는?”

“어. 거기. 비 잠깐 갠 사이에 나갔더니 그리 훌륭한 풍경이 떡하니 펼쳐져 있더라고. 형 생각 나서 보냈네.”

이후 서로 안부를 물으며 별일이 하도 없어 무사하고 심심한 일상에 대해 토로하다 헤어졌다.

가고 싶다,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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