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

노트 2020. 9. 22. 16:01

28  폼롤러를 깔고 엎드리고, 껴안고 뒹굴며 핸드폰을 보는 아이에게 아내가 말했다.

원 _ 아주 죽부인을 끼고 사시는구만.

온 _ 뭔 부인?

원 _ 죽부인

온 _ 아, 그 죽부인....... 근데 얘는 김부인이야. 

원 _ 김부인? 왜? 내가 김씨라서?

온 - 그건 아니고. 그냥 얘 엄마가 김씨고 아빠는 죽씨라서.

원 _ 김부인 좋네. 양성을 다 쓸 수도 있어. 김죽부인이라고.

온 _ 김죽부인? 뭐, 괜찮네.

하여 파란색 폼롤러는 김죽부인이 되시었다.

 

25  아내의 추천으로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판타지소설을 읽고 있다. 오늘 이런 구절이 있어 적어놓는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지식이라 부른다지만, 그렇게 알고 또 알게 되어 도착한 곳은....... 결국 무지였어. 이 세계가 무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게 지성이다.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많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

 

23  비몽사몽 일어나 온라인 수업을 시작한 아이가 한 시간 반가량 지나자 수업 끝났다며 배가 고프다 했다. 식빵을 썰어 딸기잼을 꼭꼭 발라주었다. 냠냠 먹던 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안 먹어?

한 달 가까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삶인지라 자조적으로 말했다.

어. 뭐 하는 일도 없는데 꼬박 꼬박 끼니를 챙겨 먹기 쑥스러워서. 넌 온수 했으니까 맛있게 먹어.

아이가 말했다.

아빠. 아빠는 그냥, 살아 있으면 돼. 아빠는 존재 자체로 충분히 일 하고 있는 거니까 먹어도 된다고.

 

22  광복절 집회를 기점으로 다시 확산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잠정 폐쇄되었던 장애인복지관이 5주 만에 문을 열었다.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선선했다. 나무와 풀에 묻어 반짝이는 햇빛을 보며 가고 있는데 음악이 귀에 들어왔다. 너무도 익숙한 멜로디와 리듬과 악기 편성.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음악에 맞춰 계속 손이 지휘를 할 만큼, 몸이 기억할 만큼 익숙한 곡인데 도무지 작곡가와 곡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으 ~ 눈을 질끈 감고 집중해보았으나 떠오를 듯 말듯 하다 사라지곤 했다. 귀를 곤두세우고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곡명을 알려주려 하는데 내비게이션이 끼어들었다. 백안리, 백안리 방향으로 우회전입니다. 말과 소리가 섞여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 젠장! 내리기 전 가까스로 프로그램이 '김미숙의 가정음악'인 것을 알았다.

5주 동안 빠진 근육을 살짝 채워주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김미숙의 가정음악’ 사이트에 들어가 선곡표를 찾아보았다. 작곡가와 곡명을 확인하고는, 이게 그렇게 생각나지 않았다고? 허탈해 혼자 키득 키득 웃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과 5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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