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2

노트 2011. 7. 12. 09:48


작업실을 나서는데 먼 산 위 노을. 옥상에 올라 바라본다. 조금 조금, 시나브로 구름은 흩어지고 사위는 어두워진다. 나지막이 말한다. 나도 좀 데리고 가거라, 노을아.(20)

돌아와 집을 보니 북두칠성이 옥상에 걸려 있다. 국자 손잡이가 왼쪽으로 45도 기운 형태. 반갑다, 별. 국자로 집 안의 고인 물들을 퍼내는 형국이라 생각하는 걸 보니, 장마 내내 집에 스며들어 축축한 습기에 치였던 게로구나.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란 연극이 떠오른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속에 있다 했던가? 집안의 습기에 시달리며 날씨처럼 눅눅하고 까칠해진 나를 견뎌낸 태홍에게 미안하다.(19)

비님 참 징하게 오신다. 해님 보고 싶다.(13)

자식과 손자의 고단하지 않은 삶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할머니께 습관처럼 절을 드리다 울컥 눈물을 흘린다. 죄송해요. 할머니. 이 못난 손자, 용서하셔요. 할머니.(12)

이른 아침, 계란찜을 하려 달걀을 깨다 문득 생각한다. '달걀'....... 닭의 알이라는 건조한 사실로부터 어찌 이리 부드럽고 매끈한 말이 나왔을까?(12)

약 보름 전, 작업실 현관 문 앞 나무 우체통에 이름 모를 새가 둥지를 틀고 알을 낳은 걸 보게 되었다. 그 후로 어미새는 알을 품다 우리가 작업실을 드나들 때마다 인기척에 놀라 후드득 파드득 우체통을 빠져나와 길 건너 나뭇가지나 울타리에 앉아 경계를 하다 사람의 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우체통으로 돌아오곤 했다. 나름 조심한다 했으나 그렇다고 드나들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고, 저리 왔다 갔다 하다 제 시간만큼 알을 품지 못해 새끼들이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다.
오늘 오전,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친구가 말했다. "새끼들이 알을 깨고 나왔네. 세 마리. 하, 고녀석들". 조심조심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눈도 뜨지 못한 새끼 세 마리가 입을 오물거리며 곧 꺼질 듯 모여 있었다. 둥지에는 어디서 씨가 날아와 앉았는지 새싹도 돋아나 있었다. 다행이다. 여린 녀석들. 세상에 나왔구나.
집에 돌아가 태홍에게 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도 어미인지라 새끼가 알을 깨고 나왔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꾸 들여다보지 마세요. 각인이라고, 새 새끼들은 눈을 뜰 즈음에 보이는 것을 제 어미로 알고 따른다잖아요. 하 하". 아기 새 세 마리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상상을 하니 내가 가벼워지고 신선해졌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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